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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장(광복 분단 50년: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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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장(광복 분단 50년:33)

입력
199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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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간 한국체육 견인/정·재계 거물 두루 거쳐/여운형·신익희·이기붕·박종규·정주영·노태우씨 등 역임/거의 정치권 뜻따라 낙점인사… 85년부터 체육인이 맡아한국스포츠의 총본산인 대한체육회. 올해로 창립 75주년을 맞는 이 단체의 역사는 곧바로 한국근세사의 모습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정치 격변기, 권위주의의 군사정권을 거쳐 문민시대의 도래로 이어지는 영욕의 세월을 체육회는 위상을 유지하며 연륜의 수레바퀴를 굴려왔다.

○「조선체육회」가 전신

이같은 상관관계는 역대 체육회 수장들의 면면을 되돌아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해방이후의 역대회장 가운데 여운형(11대) 신익희(14대) 조병옥(16대) 이기붕(17대) 이철승(18대) 민관식(22대) 김택수(24대) 박종규(25대) 조상호(26대) 정주영(27대) 노태우(28대)등 세인의 눈과 귀에 익은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는 것은 체육회장이 단순히 스포츠 단체장이 아님을 입증한다. 따라서 「한국체육 반세기」를 이끌어 온 체육회장은 체육인보다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인물이 대종을 이루어왔다. 특히 정치적으로 이용 당하는 경우가 일쑤여서 체육회는 때로는 정치의 실세로 위엄을 떨쳤고, 때로는 정치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체육회의 전신은 민족체육의 기치를 내걸고 1920년 7월13일 창립된 「조선체육회」. 일제하 암흑시절 장두현(1대·동양물산사장) 고원훈(2대·보성전문교장)을 비롯, 3·1독립선언서 서명 33인중 한명인 최린(3대·천도교교령)과 윤치호(9대·교육자겸 독립운동가)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회장을 거쳤다. 10대 유억겸 회장을 마지막으로 38년 7월4일 강제 해산될 때까지 조선체육회는 스포츠를 통한 민족주의운동과 항일의지를 나타내는 중추역할을 했다.

건국후 체육회 수장은 격변기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해방의 기쁨과 의욕속에서 형성된 조선체육회 재건의 공감대는 작업추진 한달만에 「대한체육회」의 정식발족으로 결실을 보았다. 건국준비위원회를 탄생시킨 여운형 선생(45년11월∼47년9월)이 1945년 11월26일 11대 회장으로 추대돼 해방후 첫 회장으로 테이프를 끊었다. 한국체육이 비로소 태극기를 앞세우고 세계무대를 활발하게 두드린 감격의 시기였다. 47년 4월17일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 해방후 처음으로 이국땅에 태극기를 휘날렸고 이어 6·25 발발직전인 50년4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역시 같은 대회에서 1·2·3위를 휩쓸어 「마라톤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건국초의 혼란한 정치상황은 체육계에도 여과없이 밀어닥쳐 크고작은 말썽이 그치질 않았다. 여운형 회장이 47년7월19일 저격당해 사망했고, 신익희 회장(48년9월∼49년10월)은 보스턴마라톤 대표파견문제로 야기된 육상연맹의 내분이 체육회 전체의 정화문제로 비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중재에도 불구, 전임원과 함께 사퇴했다. 또 조병옥 회장(51년6월∼52년9월)은 부산 피란시절인 52년 헬싱키올림픽 대표선수단 구성문제로 말썽이 일자 사퇴서를 써놓고 단장의 자격으로 올림픽에 나갔다가 사퇴서가 수리되는 바람에 그대로 퇴진했다.

후임회장은 당시 정치권의 실세였던 이기붕씨(52년9월∼60년4월). 민관식씨(64년1월∼71년7월)와 함께 7년7개월의 최장수를 누린 이회장은 대한체육회를 사단법인으로 전환시키는 작업과 경기력 향상을 위한 집중투자등 실력자답게 굵직굵직한 사안을 처리했다. 4·19혁명으로 1공화국이 몰락하면서 이회장은 물러나고 2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당소속의 체육인 이철승씨(61년1월∼61년5월)가 18대총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5개월만에 물러났다.

○스포츠 활성화 큰 기여

3공화국은 정권의 비정통성을 경제개발과 스포츠 중시정책으로 만회하려 했다. 때문에 3공의 체육회장은 최고통치권자의 뜻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는 측근인물이 지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시각이야 어찌됐든 그때 이후의 「낙점」회장들은 국내스포츠 발전과 국제경쟁력 강화, 국민들의 스포츠활동 참여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22대 민관식 회장은 태릉선수촌 개설과 서울 무교동의 구 대한체육회관 건립의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또 김택수 회장(71년11월∼79년2월)은 재임중 74년 뮌헨올림픽서 양정모(레슬링)의 첫 금메달, 여자배구팀의 동메달등으로 한국의 올림픽 출전사상 최고성적을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말기에 체육회장이 된 박종규씨(79년2월∼80년7월)는 88서울올림픽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반인들이 「피스톨 박」으로 경원시해 온 것과는 달리 체육회장 취임 2년전인 77년부터 올림픽유치를 역설하고 78년 한국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사격)를 유치하는 등 왕성한 스포츠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대한체육회는 「스포츠공화국」으로까지 불리는 5공화국이 생겨나면서 전기를 맞았다. 「국보위의 지침」에 따라 대대적인 「정화작업」이 이루어지고 경기단체장에 기존의 정치인출신 대신 경제인들이 대거 영입됐다. 이런 가운데 부임한 조상호 회장(80년 7월∼82년 7월)은 전임 박회장의 역점사업을 승계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물론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81년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서울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한국체육의 위상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뒤이어 취임한 정주영 회장(82년 7월∼84년 10월)은 종래 정치인들의 단골자리를 재계의 거물급 경제인이 맡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가 올림픽유치 사절단장으로 88올림픽 유치에 크게 기여한 것은 다 아는 사실. 부임하면서 『나는 봉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던 정회장은 2년3개월의 재임기간동안 40억원의 사재를 투자하고도 돈많이 쓰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함이 돋보였다는 평. 『체육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노태우 회장(84년 10월∼85년 4월)은 초대체육부장관·88올림픽조직위원장을 거쳐 범국가적 사업이었던 86, 88양대제전을 직접 치를 것으로 기대됐으나 정당대표라는 또다른 대임때문에 7개월만에 김종하(85년 5월∼88년 11월) 당시 핸드볼협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낙점」관행에 의한 정치일색의 체육회장 취임은 사회 각 부문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제30대 김종열, 31대 김운용 회장의 경선에 의한 당선으로 일단 마감됐다. 결국 체육회장은 정치인출신에서 경제인으로, 그리고는 체육인으로 제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체육회의 위상은 이와는 달리 정­체유착의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위축돼 가는 듯 하기도 하다.<남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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