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경수로 지원을 둘러싼 미·북협상은 우여곡절 끝에 콸라룸푸르 준고위급 회담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이번 회담의 최대 난제는 역시 한국형 경수로 수용문제였다. 미·북 공동발표문에는 한국형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내부 합의를 갖고 있는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ODO)가 노형을 선정하고, 특히 그 노형에 있어서 「현재 건설중인 두개의 냉각제 유로를 가진 1천㎿ 가압 경수로 2기」로 한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사실상 현재 세계에서 건설되고 있는 경수로 중에 미국형은 하나도 없으며, 두개의 유로를 지닌 경수로는 바로 울진에 건설중인 한국형 경수로의 주요 특징이다. 비록 「한국 표준형 원자력 발전소」(KSNP)라는 용어가 명시되지 않아 개운치는 않지만, 이번 협상에서 우리의 중심적 역할과 한국형 수용이 관철되었고, 향후 북한에 건설될 경수로는 한국형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북한은 한국형 수용의 대가로 10억달러 상당의 추가시설 비용을 요구하였으며 이 문제는 향후 KEDO와 북한사이에 논의하기로 되었다.이번 경수로 협상 합의과정은 우리에게 북한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정보와 교훈을 주고 있다. 우선 김정일의 공식 승계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은 한국형을 강요할 경우 핵동결을 해제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극한전략을 취했지만 극한전략의 강도가 예전같지 않으며 협상과정 내내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미·북협상에서 조속한 가시적 성과가 김정일의 공식 승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 최근 북한이 국제시장에서 쌀을 구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점을 주목할만 하다.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비싼 쌀보다는 밀이나 옥수수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련의 움직임은 김정일의 공식승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로 김정일이 협상과정을 매우 일관되게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제네바에서 한국형을 수용했던 북한이 입장을 번복한 것을 두고, 한국형 수용에 대해 불만을 갖는 군부등 강경파와 외교부 사이의 강온대립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협상과정에서 북측은 군부 등 강경파를 언급하면서 미측의 타협을 요구하곤 했으며 강석주 대신 김계관으로 대표가 교체됨으로써 강온대립설이 미국무부를 중심으로 무게를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합의 내용을 볼 때, 북한의 강온대립이 정말 있었는가 의문이 든다. 만일 북한내에 정말 심각한 강온대립이 있다면 그 징조가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사후의 북한은 비록 대남 비방은 심해졌지만 놀라울 정도로 대외정책에 있어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사이동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김정일이 핵협상을 일관되게 통제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결국 북한은 한국형을 최대한 거부하는 가운데 이를 지렛대로 하여 보다 많은 반대급부를 챙기기 위한 전술을 취했다고 볼 수 있으며, 강온대립설도 이 전술의 일환이었다고 판단된다.
끝으로 대북 협상에 있어서 일관된 정부정책과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중요성이 이번 협상에서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수로 협상에 있어서 한국은 자신의 중심적 역할과 한국형 수용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비용을 댈 수 없다는 원칙을 시종일관 견지하였으며 언론은 물론 정치권도 이에 대해 초당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등 굳건한 국민적 컨센서스가 뒷받침되었다. 이는 북핵정책을 두고 정부내 혼선과 잡음 그리고 국민적 합의가 아쉬웠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의 일관된 정책은 북한을 초초하게 하고 북한 스스로 자신의 카드를 보이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북한은 협상초기 러시아형, 독일형, 미국형을 차례차례로 요구하다가 급기야 한미 잡종형(영광형) 경수로를 달라고 하여 한국의 역할을 인정하기 시작하더니 회담직전에는 제작, 시공은 한국이 다해도 좋으니 설계에 있어서 미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선으로 까지 물러선 바 있었다. 그리고 이번합의에서 명칭만 명시안하였을 뿐 설계, 제작, 시공에 있어서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표준형 경수로를 수용한 것이다. 대북협상에 있어서 일관된 정부정책과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국제정치학·외교안보연구원 교수>국제정치학·외교안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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