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택민 등 보수·개혁파 뒤섞여 파워그룹 형성/요직마다 인맥… 이붕·지방세중심 반격 “변수”중국 최고실력자 덩샤오핑(등소평)사망이후 중국사회를 이끌어나갈 파워그룹으로 「상하이(상해)인맥」이 떠오르고 있다. 일명 「상하이방」, 「상하이파」, 「상하이 커넥션」등으로 불리는 이 그룹은 파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특성상 수면하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중앙정치무대인 중난하이(중남해)에서 이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상하이방이라는 말은 최근 중난하이의 실세로서 또 개혁개방노선을 추진하는 신세대 정치인으로 떠오르는 인물들중에 고향 출신학교가 상하이이거나 상하이에서 공직생활을 하는등 여러가지 면에서 상하이와 연관을 갖는 인사들이 많은 까닭에 이들을 총칭해서 홍콩·서방언론들이 붙인 용어다.
물론 이들 인사들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정치노선등에 따라 친소관계는 다르지만 이들이 현재 중국의 정치·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등사후 중국을 이끌고 나갈 선두주자로 등장하고 있어 대내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현재 총서기겸 국가주석인 장쩌민(강택민·68)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인맥은 대개 세부류로 나뉜다. 강의 직계로 볼 수 있는 층과 중도적 성향인 강에 비해 개혁성향이 보다 강한 층, 그리고 과거 보수파로 분류돼 온 관료파에 속한 층이다.
먼저 상하이방의 수장격인 강은 등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지만 총서기, 국가주석, 당군사위주석등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한손에 쥐고 있다.
강은 상하이 교통대학을 나와 89년 6·4 천안문 사태로 물러난 쟈오쯔양(조자양)의 후임으로 총서기로 발탁되기 전까지 상하이 시장과 시당서기를 역임했다. 「포스트등」시대의 권력을 손에 쥘 가장 강력한 후보로 등장한 강은 권력의 핵심요직에 자신의 직계를 중심으로 상하이인맥들을 심어놓고 있다.
최근 중국권력의 핵심인사로 부각되고 있는 정칭홍(증경홍·56)당중앙위 판공실주임은 강의 심복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왕다오한(왕도함·80)해협양안관계협회장은 강과 강의 직계세력의 후견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의 고르바초프」로 불리는 주룽지(주용기·67) 상무부총리. 그는 강의 직계는 아니지만 개혁·개방정책의 상징적인 인물로 범상하이파에 속한다.
강총서기가 상하이시장 재임시 구체화한 「상하이를 21세기 국제경제중심지로 육성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인 포동 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 등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인기만은 강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는 주는 조만간 리펑(이붕)총리를 이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지난 3월 열린 중국 제8기 전인대 3차회의에서 공업부총리에 임명돼 부총리 5명 대열에 오른 우방궈(오방국·53)전상하이시장은 상하이인맥의 떠오르는 별이다.
오부총리는 지난해 9월 14기 4중전회에서 50대로는 드물게 정치국원으로 승진돼 황주(황국·59) 상하이시당서기등과 함께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해방전 상하이에서 항일구국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강총서기의 상급자로 인연을 맺은 첸지천(전기침)부총리와 차오스(교석·70)전인대상무위원장도 관료출신으로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빼놓을 수 없는 범상하이방의 인사들이다.
이밖에 딩관근(정관근·66)중앙서기처 서기와 주량(71)전인대 상무위원등도 상하이방의 대열에 들어있다.
그러나 강총서기그룹의 독주에 대한 이붕총리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 나아가 지방세력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지난 3월 제8기 전인대 3차회의에서 오방국와 장춘윈(강춘운)등 강 총서기계열 신임부총리에 대한 임명동의안에서 지지율이 각각 86%와 63%에 불과하고 중난하이의 많은 간부들이 강총서기가 상하이관련 인사를 승진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 총서기는 이를 불식시키고 단합을 위해 최근 내부연설에서 「자신은 상하이방의 두목이 아니며 중국지도부에 이같은 파벌은 없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후퇴하지 않는 한 상하이인맥의 부상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상하이 푸단(복단)대학의 한 교수는 『상하이인맥은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파벌집단이 아니며 상하이라는 대도시에서 행정능력을 평가받은 개혁지향적 인사들이 개혁개방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강총서기를 중심으로 중앙무대에 등장한 추상적 집단』이라며 『그러나 상하이그룹이 살아남는 길은 상하이인맥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격차를 해소하고 국내경제를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상하이·베이징=김혁 기자>상하이·베이징=김혁>
◎상해 한복판 5평짜리 방에서/중국공산당 고고성 울렸다/대표13명 7일간 회의(중국 리포트:71)
상하이(상해)의 한복판인 싱이에(흥업)노 76번가에 있는 중국공산당 1차회의 장소는 중국공산당의 탄생지이다. 우리의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마당노에서 걸어서 불과 5분여 거리에 있다.
검정벽돌과 붉은벽돌을 섞어지은 2층건물의 아래층,벽과 마루가 나무로된 5평 남짓한 방이 중국공산당이 고고성을 울린 곳이다.
74년전인 21년 7월23일부터 30일까지 13명의 중국공산당 지역대표는 감시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중국공산당 창당을 선언했다. 당시 중국전체의 공산당원수는 불과 53명이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의 고향인 후난(호남)성 창샤(장사)의 대표로 참석했고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이념적지주였던 젠두슈(진독수)가 초대 당서기로 추대됐다. 그리고 국제공산주의 연맹(코민테른)은 네덜란드인 마링과 러시아인 니콜스키를 이 회의에 파견해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공인했다.
이 건물은 회의참석자중 한명인 리한준(이한준) 형의 집으로 프랑스조계안에 있었다. 회의가 열렸던 1층방은 나무로된 의자와 직사각형의 회의탁자등이 원형대로 복원돼있고 참석자들이 사용했다는 찻주전자와 찻잔및 꽃병등도 그대로 놓여있다. 이방에서 당시 열혈청년들이었던 회의참석자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상을 중국땅에 실현하겠다는 중국공산당강령을 작성했다.
중국공산당은 53명의 당원으로 이처럼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28년뒤인 49년 10월1일 베이징(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버린다.마오쩌둥의 말대로 중국공산당의 탄생은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었던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집권하자마자 이건물의 복원을 서둘렀고 51년부터 중국혁명기념관으로 명명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건물에는 3개의 전시실에 중국공산당창당선언문과 강령등 각종희귀자료와 당시의 사진등 1백74점의 각종자료가 전시돼 있다.<상하이=이병규 기자>상하이=이병규>
□중국 기동취재반
이병규(정치2부차장)
송대수(베이징특파원)
하종오(사회2부기자)
김병찬(문화1부기자)
김삼우(체육부기자)
이동국(정치1부 기자)
김병주(경제2부기자)
김 혁(전국부기자)
장학만(사회1부기자)
김건수(사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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