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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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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소설평)

입력
1995.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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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비극적 무늬 섬세한 포착배수아의 소설이 던져주는 인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마도 「적막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첫 창작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 실려 있는 7편의 중·단편은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한 그러면서도 흡인력있는 아름다움의 공간을 부조해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한정된 인물들이 한정된 시·공간에 등장해서 빚어내는 감정의 무늬를 극히 섬세하면서도 단아하게 포착하고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배수아는 오정희에서 신경숙으로 이어지는 서정적 여성소설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데뷔작 「천구백팔십팔 년의 어두운 방」에서 작가는 가을날 바닷가로 여행을 온 이삼십대 남녀들의 하룻밤 행적을 뒤따르면서 삶의 허망함과 부조리함을 음울하면서도 화사하게 드러낸다. 그 젊은이들은 함께 어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채 고립된 개체들로 머물러 있다. 불행은 예고없이 찾아오고 진실은 조만간 허위와 자리바꿈하며 작중인물에겐 현재의 기록인 사진마저 남지 않는다. 모든 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비극적 인식은 다른 작품에도 계속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주인공소녀는 어머니 임종 후 창턱에 두 팔을 괴고 어두운 밤풍경을 바라보며 이미 닫혀버린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며,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주인공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 자신도 언젠가는 먼지투성이의 길가에서 푸른 사과를 파는 초라한 여인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은 사소한, 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점철돼 있으며 작중인물들은 그런 불행에 선험적으로 익숙해 있다. 「생은 변경될 수 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삶의 내용을 바꾸고자 하는 모반의 몸짓이 전혀 시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즉흥적인 여행―외출모티브나 「아멜리의 파스텔그림」 「인디언 레드의 지붕」같은 몽환적이고 이국적인 대상들은 틀에 박힌 일상 바깥에 위치한 세계를 향한 동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적 지향은 조만간 일상으로의 회귀를 강제하는 현실여건에 의해 저지당하고 작중인물들은 다시 우울과 상실감 속에 무기력하게 빠져들고 만다.

배수아의 소설은 90년대의 우리 현실이 70∼80년대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출구없는 미로요 불모의 공간임을 역설하고 있다. 삶 속에 잠복해 있는 불행의 기미에 대단히 민감한 이 작가가 앞으로 세기말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길어낼 후속작품들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하자.<남진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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