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지역적 고뇌·문제해결이 세계화 지름길/서삼릉 복원 등 주민노력 전국적 관심을지방화가 곧 세계화라는 것은 결코 지역자치주의자의 강변이 아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진행되는 지금의 세계화 대세의 특징을 해명하는 극히 과학적인 명제다.
최신과학에 「홀로그램」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적인 전체유동이 작은 한 부분 속에 축약돼 있다는 것이다. 마치 뇌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다 각각 생명 전체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원형인 풍류도의 「한」사상도 같은 것이다. 「한」은 「크다」의 뜻이면서 동시에 「낱개」의 뜻이다. 작은 「낱개」 속에 큰 우주가 들어 있어 생동한다는 것이 「한」사상의 핵심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나름의 창조적 세계화를 실천해야만 한다. 마땅히 작은 지방 속에 있는 삶의 전세계적 문제점들을 찾아내 세계사가 지향하고 있는 새로운 가치기준에 따라 지역주민 스스로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운동을 통해 창조적 세계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제점들은 또한 흔히 그 지역의 독특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전 국가적인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역주민만 아니라 전국의 시민들과 정부도 그 해결에 적극 지원해 나서야 하는 것이 창조적 세계화운동의 한 요체다.
○지방역사 적극 발굴해야
그러면 세계사가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기준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자기 민족의 역사와 지방의 역사를 오히려 더 열심히 찾아내고 보존하며 그 보편적 의의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삶의 질」의 핵심인 문화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보존·창조하는 일이며 나아가 전지구적이고 인류적 문제인 환경파괴를 해결할 생태적 합리성과 생명가치를 확보하는 일이다.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대장장이 집에 식칼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오랜 세월 언필칭 생명운동과 지역자치·주민자치운동을 해 온 사람이다. 그런데도 전국적 차원의 발언이나 행동만 해왔지 막상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는 등한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다. 지자제선거를 계기로 고양시민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바로 그와 같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문제점들을 접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고양시에 있는, 일제가 만든 「태실」의 담장문제, 1백만 평에 달하는 「서삼릉」땅의 공개와 되사들이는 문제, 고양시당국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일산신도시 안에 국내 최대의 쓰레기소각장 건설을 강행하고 있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항해 일어나고 있는 고양시주민과 시민단체들의 움직임등이다.
「틈」이 꼭 창조의 가능성이 넘치는 긍정적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빈 틈은 도적놈들이 날뛰는 좋은 온상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36년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사의 공백, 빈 틈이었다. 이 「빈 틈을 타고」 강도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전북 금산에 있던 이태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비롯 전국 각지에 산재하던 조선조 임금·대군·공주의 태실 53위를 모두 한 곳에 모아 똑 지금의 중앙청 구조와 같은 날 일자 모양의 시멘트블록의 담장 안에 가둬 놓고 일본 신사참배소 출입문과 같은 모양의 철제문을 세워 잠근 뒤 일절 일반인 출입을 막아버렸다. 더욱이 일제는 전국의 태실을 파헤치면서 태를 담아 둔 조선백자등 각종 보물을 싸그리 도굴해 갔다.
여기에 대해 이승만이래 지금까지의 역대 정권은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며 아마 알았다 치더라도 오불관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스스로 애국자, 민족지도자를 자처하는 숱한 명망가와 지식인들, 그리고 중앙여론과 문화재관리국마저도 이제껏 캄캄 밤중이었다.
이 「빈 틈을 타고」 자칭 민족지도자, 애국자들 눈에는 하잘 것 없는 민초들인 고양시주민들이 나서서 이 일본담장의 철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사참배소형의 철제문을 헐고 우리식 전통 곡담과 솟을대문을 세우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거세어지자 그제서야 문화재관리국이 나서서 담장은 우선 허물었다.
나는 존왕은 커녕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자도 아니며 국수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민족성이라는 것은 명백히 있는 것이고 민족정기라는 것도 명백히 살아 있고 또 살아나야 한다. 이 민중주권의 시대에 전조의 왕실 따위가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우주에 편만한 생명력 곧 기를 믿는 사람이며 고양시에서와 같이 오늘날엔 민초들이 스스로 발현하고 되살리고자 하는 바로 그 민족정기가 과거 왕실과 전혀 무관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자칭 민족지도자들이 그렇게 자칭해서 제 이익 챙기기에만 바빠 등한시해 온 이 「빈 틈을 타고」 오히려 민초들이 스스로 민족정기와 제 나라 역사를 알뜰하게 챙기는 것은 이 세계화의 시대가 도리어 요구하고 있는 개방적 민족주체 확립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은 고양시민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민과 바로 정부의 일이기도 한 것이다.
1961년부터 30여년은 민주주의의 공백기, 참으로 쓰라린 빈 틈이었다.
이 「빈 틈을 타고」 제멋대로 횡행한 여러 도적놈들 중의 으뜸가는 왕초가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가 1968년 어느 날 서삼릉에서 골프를 치다가 광릉 수목원에 필적할 만큼 푸르른 숲으로 가득 찬 이 광활한 땅을 바라다 보며 떠억하니 가라사대,
『저기 목장을 만들었으면…』
즉흥적인 이 한 마디에 조선왕조 최대의 묘역이 자리잡은 유서 깊은 역사와 탁월한 문화적 가치가 빛나는 땅, 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1백만평의 생태계가 바로 그날로 김종필을 비롯한 정·재계 요인들과 어용단체의 뭇 잡놈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어 숲은 가차없이 베어지고 흙은 무자비하게 파헤쳐져 골프장, 방목목장 따위로 둔갑, 오늘날과 같은 황량한 지역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능의 분묘만 달랑 남긴채 모조리 사유지화하여 이젠 공개할래야 공개할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현재 문화재관리국 소유로 겨우 남아 있는 7만평중, 그나마 목초지와 마사회의 초지로 둘러싸여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은 희릉, 예릉의 2만여평 뿐이다.
○「땅 한평사기운동」 준비
정부나, 자칭 민족지도자, 고매한 지식인과 중앙언론이 이 문제에 하등 관심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세태인지도 모르겠다. 예릉, 효릉, 희릉 외에도 의왕묘, 희묘, 소경원, 효창원, 의령원, 왕자·공주묘 22기와 귀인묘, 숙의묘등이 자리잡은 조선왕가 묘역 중 최대 규모인 이 서삼릉의 역사·문화 및 생태적 가치에 먼저 눈뜨고 행동에 돌입한 것은 또 역시 이 망각의 「빈 틈을 타고」 민족과 자기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고양시민들의 슬기로움이었다. 시민들은 「서삼릉 되살리기운동」의 첫 걸음으로 비공개지역에 대한 시민답사운동을 넓게 펼치고 있으며 이 지역의 공개를 요구하고 사유지화한 이 지역을 되사들여 시민생태문화 및 역사공부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주민 한 사람당 3만원짜리인 「땅 한 평 사기운동」을 준비 중에 있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어째서 고양시민만의 일인가? 구라파와 인도와 태국, 일본, 중국등을 돈푼깨나 있다고 너나없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곳의 역사유물과 왕가의 유적등을 쳐다 보고 바보처럼 입만 커다랗게 벌리다 돌아오면 그만인가? 마땅히 전국민적인 캠페인이 일어나 땅을 전면 공개하며 사유분을 모두 되사들여 이곳을 중요한 민족사적 유적으로, 문화적 생태공원으로 복원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일산신도시는 정직하게 말해서 서울의 베드타운에 불과하다. 30여만의 주민들의 직장이 거의 대개가 서울에 있으므로 남자들은 서울의 직장생활에 묶여 지역문제에 하등의 관심을 쏟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바로 이 「빈 틈을 타고」 이미 쓰레기종량제의 성공으로 재검토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쓰레기소각장」을, 그것도 1일 처리용량 6백톤이라는 전국 최대규모의 공장 건설을 강행하고 있는 고양시관계자들은 분명 관심의 빈 틈에서 깝치는 생명에 무지한 도적놈들임에 틀림없다. 6백톤의 쓰레기중 40%가 물기가 흥건한 음식쓰레기여서 소각하기가 매우 어렵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소각할 경우 다이옥신과 같은 인체에 치명적인 오염물질이 대량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소각장 건설비용으로 「음식물쓰레기 퇴비화공장」이나 「음식물 쓰레기 바이오 가스 재생산시설」등을 설치한다면 생명과 직결되는 신도시의 대기오염을 막을 수 있을 뿐아니라 쓰레기배출량의 70∼80%를 재활용하여 신도시 주변 광활한 농경지대를 대거 유기농업화함으로써 신도시에 고부가가치의 무공해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고 그래서 토박이와 뜨내기가 화해하는 도·농 공동체적 순환과 공생의 삶터를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고양시민, 주민들 속에서 바로 이런 논의가 지금 활성화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 전국적인 환경운동 단체들이 연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할 전국적 맥락을 가진 표본적인 지역정부 실패의 한 사례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깨닫고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그 개선에 힘써야 할 사람들은 역시 고양지역의 시민·주민들이다. 그 중에도 지역에서 내내 생활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 생명가치에 누구보다 더 민감한 바로 그 주부들이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주부들의 힘 필요한때
남편들이 서울의 직장에 매달려 있노라 잊어버린 지역생활의 빈 틈, 그래서 무지한 도적놈들이 멋대로 횡행하는 이 「빈 틈을 거꾸로 타고」 주부들이 대거 그 해결과 개선에 능동적으로 나섬으로써 민족정기의 회복, 역사 문화 생태적 가치의 민주주의적 회복, 그리고 환경문제와 생명가치 확보라는 창조적 세계화 방향으로 지역 시민·주민자치운동을 활성화하여 바람직한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여성이 창조적 주체가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6월27일 지자제선거는 이런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틈」이다. 서삼릉과 소각장과 같은 문제들을 내걸고 정당이 아니라 정책과 인물 중심으로 지자제선거를 치러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힘의 집중을 통해 시민·주민, 특히 주부들 중심의 장기적인 주민자치·생활정치의 바탕을 닦아야 한다. 이것은 고양지역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지역자치운동의 보편적 방향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방화를 통한 참된 창조적 세계화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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