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떤 시골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앙브리쿠르본당의 젊은 신부는 가난을 축복하는 예수의 기적을 믿으면서도 암에 걸려 죽어야 되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두려워 한다. 이 소설이 『모든 것은 은총이야』라는 중얼거림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마지막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모든 장면은 불안과 공포, 전율로 가득 차 있다.어느 누구에게나 죽음은 하나의 구원이라고 장자는 말했다. 조지훈은 병에게 「자네는 나의 오래된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라고 하였고 김수영은 시간의 부식작용을 태연히 받아들이며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하였다. 베르나노스의 실존주의와 반대되는 이러한 견인주의가 동양에 국한된 태도는 아니다. 올해 61세가 된 부녀해방운동가 글로리아 스테이넘도 「60대란 50대와 또 다른 무엇이 있는 미지의 세계」로서 「자신의 몸이 어떻게 늙어가는 지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사상」 5월호에 실린 문충성의 「작별」은 죽음에 대한 실존주의적 태도와 견인주의적 태도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시이다. 이 작품은 눈보라와 불씨의 대립에 근거하고 있다. 시의 주인공은 세상을 사랑했으나 그가 세상에서 만난 것은 슬픔과 번뇌, 놀라움과 허망함이었다. 그는 「허무의 불 담는 그릇 들고」 「삔 발목 절룩이며」 불씨를 구걸해 온, 지난 날들을 기억해 낸다. 그는 자신의 삶을 「누더기 그리움」이라는 모순어법으로 표현해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소용돌이치는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마음은 누더기가 되었으나 누더기에 싸인 거지의 마음에도 그리움의 불씨는 보존되어 있었다.
문충성에게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불씨를 보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새로운 불씨를 얻기 위하여 이민가는 이어도이다. 「누구일까 찾는 이 있다면 이어도에/갔다 하라 불씨 하나 얻으러/40여년동안/꿈꿔 온 꿈의 불씨/이미 꺼졌도다」 저승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는 가능하면 이승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지우고 싶어 한다. 「누구일까 찾는 이 없겠지만」 설령 누가 찾더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그림자까지 차곡차곡/접어 놓고」 떠나고 싶어한다. 저승길은 길을 지우며 걸어야 하는 사막의 길이다. 그러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은 불씨에서 불씨로 이어지는 길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는 길이다. 그때 미래는 과거와 만나 원환을 그린다. 잃어버린 낙원만이 참된 낙원이기 때문이다.<김인환 문학평론가·고려대교수>김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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