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을 돌아보면 화살이 떠오른다. 화살은 휘익 날아가 어디엔가 콱 박히면 뽑아내지 않는한 그자리에 꽂혀 있다. 나는 파리로 날아가 20년간 박혀 있었고, 다시 마산으로 날아왔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때까지 작품을 하고 미술관을 세우겠다』지난 80년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고향에 정착했던 조각가 문신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를 만나러 마산에 갔을때 그는 바다가 보이는 추산동 언덕위에 겨우 비바람을 가릴만한 살림집과 작업장을 짓고, 스테인리스와 흑단나무로 시메트리(좌우균제)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미술관 건립의 꿈을 밝혔지만, 나의 눈에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비쳤다.
그러나 그 꿈은 서서히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 머물수 있는 시간이 15년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처럼 결사적으로 미술관 건립에 매달렸다. 작품이 팔릴때마다 공사가 한발한발 진척됐다. 십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94년 드디어 문신미술관이 완공됐다. 그 미술관은 24일 세상을 떠난 문신씨가 고향에 바친 필생의 선물이다.
문신미술관은 그가 어린시절부터 살던 집터와 뒷산을 합쳐서 세워졌다. 뒷산 3천여평은 그가 일본유학시절 영화간판을 그리며 저축한 돈으로 샀다. 그는 파리에서 센강에 몸을 던지고 싶을만큼 가난과 절망에 허덕이면서도 고향집을 팔지 않았는데 『고향에 집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돌아갈 구체적인 곳이 있다는 구원을 의미했다』고 회고했다.
미술관을 완공한후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미술관앞에 고층아파트를 세우려는 시당국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마산 문화계의 잇단 탄원에도 아파트 공사가 강행되자 그는 고향을 떠나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암에 걸린 것을 알았고, 병상에서도 정부와 마산시의 반문화적인 행정감각을 슬퍼하며 눈을 감았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속에서 예술에의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지상주의자였다. 지난 4월 경남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흙으로 돌아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장엄하게 산화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유언은 「반문화」에 대한 최후의 절규였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화살로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절규는 뽑히지 않는 화살로 문신미술관에 박혀 이땅의 모든 「반문화」를 고발하고있다. <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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