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부근로청소년회관 부설 임대아파트 여성근로자들/11평짜리에 5명씩 모여살아/한달고정비용 12,000원 안팎/낮에는 직장·밤엔 학원으로/“자기일에 만족하면 학력은 문제안돼”『명문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못구하는 친구들이 많잖아요. 더구나 전공을 살리는 경우는 거의 없구요. 자기일에 만족한다면 학력은 별 문제가 안되죠』 서울 남부근로청소년회관부설 임대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신세대근로여성들의 당찬 자신감이다. 향나무 은행나무 장미등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단지에는 5층아파트 5동 2백가구에 현재 정원 1천명에 한명이 모자라는 9백99명이 건강한 땀을 흘리며 미래를 꿈꾸고 있다.
충남 청주가 고향인 이미연(23)양은 고등학교 졸업후 상경,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장차 컴퓨터프로그래머의 꿈을 갖고 퇴근후에는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다. 『일과 공부를 같이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 대부분이 시간을 더 알뜰하게 쓰며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광주에서 올라온 변선미(24)양은 강남구 압구정동의 미용실에서 일한다. 『앞선 패션감각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압구정동에 직장을 얻었다』는 변양은 『서울에서 많이 배운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종합미용타운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곳 자치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박현숙(25)양도 피부미용상담사 일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박양은 『이 분야에서만은 최고가 되겠다』는 「야심」을 펼쳐보인다.
이들의 생활은 보통 검소하다는 표현 이상이다. 월세 4천4백원 외에 관리비와 전기료 수도세 가스요금등을 합쳐 한달에 한사람이 지출하는 고정비용은 1만2천원 안팎.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아침을 제외한 식사는 대개 직장에서 해결한다. 동생과 함께 사는 C제약사의 판매사원 이윤경(23)양의 한달 총생활비는 둘이 합쳐 15만원 정도이다. 『3년동안 2천만원가량 저축했다』는 이양은 올가을 결혼을 앞두고 한창 신부수업중이다.
방 2개짜리 11평아파트에 5명씩 모여살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많다. 특히 자신만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로서는 무엇보다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로의 성실한 삶이 자극이 되고 자매처럼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장점이다. 이들은 좁은 공간을 최대한 넓게 쓰기위해 보통 비키니 옷장에 간이화장대, TV, 책꽂이 정도로 가구를 제한하고 이불은 방한쪽에 곱게 개어놓고 쓴다. 방문이나 벽등에는 으레 「일을 복으로 여기자」 「고통과 실패가 나를 발전시킨다」는등의 자신을 추스르는 경구가 붙어있다.
이곳의 입주자격은 까다롭다. 우선 29세이하의 지방출신 미혼여성이어야 하고 서울시내에 직장이 있어야 한다. 아파트 안에서 술과 담배를 하다 적발되면 곧바로 쫓겨난다. 남자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어 귀가시한인 자정즈음에는 매일 단지정문에서 애틋한 이별장면이 연출된다. 또 입주기간에는 바로 옆 청소년회관에서 일정수의 강좌를 의무적으로 듣도록 돼있다. 재미있는 강의가 많고 취미활동 프로그램도 다양해 「필수학점」 따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25일은 아파트 개관 13주년이 되는 날. 이날을 앞두고 지난 일요일에는 산정호수로 단체야유회를 다녀왔다. 주문해둔 김밥도시락을 깜박 잊고 출발한 바람에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때우긴 했지만 물풍선 게임에 온몸을 적셔가며 모두들 깨알같은 웃음을 쏟아냈다.
아파트관리소장 마정인(52·여)씨는 『입주자들은 모두 생활력이 강하고 의식이 건강한 신세대 여성들』이라며 『부모에게 용돈이나 받아 쓰면서 땀의 가치를 모르는 나약한 젊은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대견해했다.<박일근 기자>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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