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지방화 잘 이루어야 창조적 세계화 가능/「풀뿌리민주」 시민힘 통해 전국 정착되게정부는 국가목표, 국가개혁의 청사진을 「세계화」로 집약하고 있다. 정부를 따라 언론과 사회 각 분야가 날마다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세계화 얘기만 무성할뿐 그것을 어디에 바탕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략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민 일반은 세계화가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망연해 한다. 이 상태대로라면 우리의 세계화는 그저 정부나 대기업의 세계화로 끝날 가능성이 있고 그것은 세계 단일시장 완성을 목표로 하는 WTO(세계무역기구)체제에의 편입과 무한개방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여기에 반발하여 혹자는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세계화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긴 하나 실속에서는, 우리의 속마음으로는 민족주의와 민족이익을 강화하고 담을 더 높이 쌓아야 한다」
이 말은 언뜻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세계화라는 탈근대적 지구사의 전개를 민족중심의 근대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완충하려는 민족·세계 분리의 피동적 사고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응은 자칫 세계화의 흐름이 국민국가의 점차적 퇴조와 함께 진행되는 데에 역행하여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쪽으로 민심을 몰아갈 가능성이 있으며 대기업으로 하여금 세계화의 대세를 거꾸로 타고 아형제국주의화를 도모하면서 신보수주의, 팽창적 쇼비니즘을 양성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아니, 이런 조짐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화, 그 실질과 방략을 그러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참된 세계화의 실질은 우리 나름의 세계화여야 하고 우리의 창조적이고 오히려 적극적인 세계화여야 한다. 우리 것,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사상 속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보편적 세계성의 씨앗을 찾아내어 그것을 창조적으로 재해석, 세계사적 의미, 문명전환기의 의미 맥락에서 확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방략은 우선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세계사 전개의 역설에서 찾아야 한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동시진행이라는 역설이 그것이다.
역설은 생명의 논리다. 생명은 역설적으로 생성한다. 이것이면서 저것이고 「아니다」이면서 「그렇다」이다. 논리로서의 역설은 언제나 대립된 양극 사이의 수평적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이중성, 그 양극은 언제나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며 생성한다. 중심을 어느 쪽에 두느냐는 입장과 조건에 따라 다르다. 국민국가주의자, 중앙의 정치가집단은 통치와 국가경륜의 차원에 서서 세계화에 우선 중심을 두고 이 세계화에 19세기적 부국강병책으로 대응하며 이 책략수행에 지방화를 종속적으로 배합한다. 이것은 근대의 뉴턴적 세계관에서는 옳게 보인다. 그러나 생활하는 민초, 시민, 주민의 입장에서는 개인 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개혁 차원에서 당연히 지방화에 중심이 치우치며 지방화를 통해서 자기 나름으로 새롭고 창조적인 방향의 세계화를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국민국가와 중앙정부에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이것이 탈근대적 세계관에서는 적합성을 갖는다.
이러한 상보적 균형의 그 기우뚱함에서 틈이 열린다. 이 틈, 근대적인 현실기준에서는 잘못이요 하자요 모자람으로밖에 안 보이는 이 그늘진 틈이 바로 탈근대적·다중심적 새 차원의 창조적 생성이 시작되는 빈 자리요 의미심장한 가능성의 예감으로 가득찬 여백인 것이다.
세계는, 특히 현대세계는 그물망으로 생성한다. 팽창확산하는 세계그물은 그물의 종선과 횡선 사이에 있는 틈과 틈을 더 넓게 벌리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화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그물인 대도시와 시장질서 사이사이의 틈들이 더 넓게, 더 의미심장하게 벌어진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이 틈은 무엇인가? 바로 지역 혹은 지방이다.
버리고 떠나는 곳, 그 저개발의 자리, 문화, 교육, 좋은 직장, 편리한 시설 모두 부족한 결핍의 땅, 여기가 틈이요 이 틈이 지방이요 농촌이요 소도시들이요 대도시의 변두리요 뒷골목이요 달동네다. 그러나 틈이 어찌 이곳뿐이랴. 대도시의 주민들 속에 솟고 있는 좀 더 아기자기한 소생태계적 블록의 「다핵구조」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또한 틈이요 시민들의 생활적인 여러 관심과 일상성의 작은 담론지향이 바로 틈이며 아파트 단위의 동네모임들이 그 틈이다. 여기에 아직 옛 전통적 가치들과 삶의 지혜가 남아 있고 여기에 새로운 생태적 삶, 생명가치와 삶의 질에 대한 첨단적인 새 시대의 요구가 솟구친다.
우리는 산업화, 도시화과정에서 한편 밥도 먹게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내일 모레면 국민소득 1만달러에 육박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정체성 상실, 신뢰관계에 기초한 공동체의 붕괴, 윤리의 실종, 참혹한 환경파괴등이 그것이다. 즉 생명과정이 해체되어 버렸다. 생명가치, 곧 「살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많은 도시인들이 떠나온 고향을 찾아 기를 쓰고 돌아가는 민족대이동은 무엇인가? 주말이면 산과 숲과 냇물을 찾아 마치 무엇에 들린 듯이 여행을 떠나는 풍속은 무엇 때문인가? 광적인 속도로 급변하는 대도시생활을 초인적인 인내로 견뎌내고는 있으나 조그마한 틈만나면 그 좁은 틈에 주저앉아 밀란 쿤데라의 이른바 「느림」을 맛보려 몸부림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생명가치에의 목마름, 「살 맛」에의 타는 욕구다.
바로 이 가치, 이 맛을 현실적으로 빈 틈에서 구체화하는 방향이 곧 지방화를 통한 창조적 세계화의 길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되는 사회가 바로 생태합리성에 입각한 자기충족적 사회, 세계연관 속에서의 개방적 자기구심을 실현하는 생명사회, 생활자치의 지역사회다.
여기에 중심을 두고 거대한 세계시장 질서와 상보적 관계로 공생하는 이중사회 경제과정의 성립, 그리하여 시장을 이 새 중심의 가치에로 점차 수정·이동시키는 이른바 시장의 성화. 새 문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풀뿌리 민주주의가 내장한 창조적 가능성, 곧 「틈」인 것이다.
지배적인 종류의 생물이 사실은 변화에 대해 느린 반응을 보이는 법이다. 인종학자와 생태학자들은 환경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창조적 적응과 변화가 그 생태계에서 지배적이지 않은 개체나 개인들, 즉 주변부에 의해 조성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오는 6월27일의 지자제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앙정치, 여·야의 저 별의별 추태를 한 번 보라. 두 당 모두가 지방자치를 총선 대선의 준비작업 정도로밖에는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안중에는 그들 자신이 내건 구호 「세계화」는 아예 없다. 지방화가 곧 창조적 세계화라는 생각은 눈씻고 봐도 없다. 지방자치의 의미는 이미 실종되어 버렸다.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구역질은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한 신선한 가능성이 한 지방도시에 나타났다. 부천시 주민들이 나서서 무소속 시장후보, 시민후보를 추대한 것이다. 이것은 여·야의 꼴사나운 추태의 탁류 밑에 흐르는 한 줄기 청수라 아니할 수 없고 쓰레기로 가득찬 시궁창에서 웬 싱싱한 씨앗 하나가 불쑥 싹튼 것같기도 하다. 나는 바로 이 시민후보 추대모임에 참석해서 축사를 한 일이 있다. 그날 그 회의장에서 느낀 상호신뢰에 가득찬 따뜻함과 소탈한 시민적 열기와 자신감에 넘치는 그 낙관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놀라움은 지난번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일어난 아오시마돌풍과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앞으로 시민후보의 무소속돌풍이 이 나라에도 일어나리라는 강한 예감을 느낀다. 그것이 부천에서부터 솟구치리라는 예감이다.
이 예감에 따라 부천시민들 속의 이 새 씨앗을 승리로 틔우기 위해 전국의 시민, 주민운동단체들과 개인들이 부천시민을 집중지원하는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전국적인 지원을 흡수한 부천의 새 씨앗이 그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승리와 함께 창조하고 부천에 이른바 생태적 합리성과 생명가치에 입각한 주민생활정치를 실현, 환경과 어메니티(AMENITY), 교통, 아파트문제, 주택개량, 교육자치, 지방문화, 청소년, 노인, 여성, 복지문제와 지방 중소기업 육성지원 및 지역노동운동 창조, 부패척결등 새로운 생활개혁운동의 모범을 지어내고 전국적인 시민·주민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며 지속적으로 지방자치제법 개정운동, 지자제선거법 개정운동, 지방재정 자립과 입법권, 과세권, 인사권등등을 차례차례 확보하는 전시민적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새 개혁돌풍을 축적하는 것, 그리고 지방정부와 의회에 견제·비판·대안제시를 통해 직접적인 주민자율정치를 확립하려는 장기적 운동인 주민자치·시민의회운동을 지원 보호 육성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다음 지자제선거에서 전국규모의 무소속 시민후보의 태풍이 일어나 풀뿌리의 전면승리로 확대되는 것, 나는 이것이 곧 우리 나름의 창조적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 전국적 지원의 집중과 부천이라는 이름의 틈 속에서의 새 씨앗의 탄생과 그 씨앗 속의 돌풍이 다시 전국에 확산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임신과 출산의 생명의 비밀이요, 생명의 카오스적, 프랙탈적 생성과정임을 느끼며 그 오묘함에 전율한다. 그날 그 회의장 벽에 이런 구호가 붙어 있었다. 「부천에서 승리하여 전국으로 퍼져라」
틈.
틈에서 싹트는 새 씨앗, 그 씨앗 속에서 터져나오는 새 사회, 새 세계, 이른바 제4의 물결. 이 생성과정을 「모심」, 성실히 모든 기운을 집중하여 모심, 조심스레 모심, 모셔 공손히 기름, 모셔 그 생성확산을 실천함. 이것이 생명운동이다. 「모심」은 곧 「살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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