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욕지사 이승환기자 방북기/역사현장 공민왕릉·선죽교 초라… 왕건릉은 재단장/비빔밥 점심에 참기름추가 요구하자 “5원 더 내라” 개성방문은 원래 일정에 없었다가 갑자기 결정됐다.일행은 평양축전이 아무런 재미가 없자 안내를 맡은 조씨에게 항의를 했다. 『이렇게 재미없는 평양축전을 이틀씩이나 보는것은 시간 낭비아닙니까…』 게다가 일정에 있었던 묘향산 등산마저 교통편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취소된터였다. 김일성이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죽었다는 얘기가 있어 혹시 이 소문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씨는 일행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대신 개성방문을 주선해 주었다. 개성은 29일 당일치기로 돌아봤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1백54의 고속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금강산 갈 때의 평양과 원산간 고속도로보다 사정이 훨씬 좋았다.원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곳곳이 패어있고 보수를 하지않아 차가 요동을 치곤했는데 개성으로 가는 도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콘크리트 포장인 이도로는 판문점을 오가는 길이어서 도로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쓴것 같았다.그러나 차를 볼수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축참관 관광객이 탄것으로 보이는 벤츠승용차 두대를 보았을 뿐이다. 원산으로 갈때는 3시간동안 5대의 차량만을 보았다.
차가 개성에 다가오자 곳곳에 콘크리트로 된 탱크저지용 구조물이 나타나 군사분계선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실감할수 있었다. 개성은 깨끗했고 도시가 잘 정비 되어 있었다. 옛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원산하고는 분위기 부터가 달랐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도시미관에 특별히 신경을 쓴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성에서는 먼저 고려 31대왕인 공민왕릉부터 보았다. 개성외곽에 있는 공민왕릉은 그의 왕비 노국공주릉과 함께 있었다. 공민왕릉 참관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위해 옛날기와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민속촌을 찾았다. 겉은 옛날 기와집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내부는 페인트칠을 하는등 엉성한 모습이어서 안타까웠다. 이곳에서 먹은 고추장맛은 일품이었다. 색깔은 그리 진하지 않았으나 쌉쌀하면서도 상큼했다.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위해 기름과 고추장을 더달라고 했더니 참기름값으로 북한돈5원(우리돈1천9백원)을 더내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참기름은 북한에서 매우 귀한 것이라고 했다.
고려태조 왕건릉으로 가기위해 개성역을 지나다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대남비방구호를 보았다. 흰종이에 검정글씨로 「김영삼 도당을 타도하자」라고 적힌 이 플래카드는 급조된것 같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플래카드는 붉은글씨로 철제 또는 목재간판에 씌어 있었는데 이 플래카드만 종이위에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릉은 92년 새로 단장됐다고 했다. 김일성이 이곳을 방문해 『고려정신을 이어받자』고 한마디하자 갑자기 능이 새로 단장되었고 고려를 고구려 못지 않게 재조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잘 만들어진 20여의 돌계단을 걸어올라가자 석조조형물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능이 나왔다.
선죽교는 기대보다 초라했다. 폭1정도에 길이 4정도의 조그만 돌다리 였다. 다리밑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나 물이 거의없었다. 북한은 선죽교를 원형보존 하기 위해 이곳을 통행금지 시킨뒤 바로 옆에 똑같은 다리를 만들어 통행토록 하고 있었다.
개성시내 한복판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었다는 남대문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차가 시내관광을 위해 천천히 달리자 소풍길에 나선 어린학생들은 고사리 손을 흔들어 댔다. 개성에는 듣던대로 곳곳에 인삼밭이 많았다. 관광상품 매대에서는 어김없이 인삼과 인삼주 인삼차등을 팔고 있었다. 인삼가격은 매우 비싸 최고급품의 경우 북한사람들의 5개월분 월급에 해당하는 북한돈으로 1천원(미화 5백여달러, 우리돈 38만원상당)이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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