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상흔 묻어둔채 양국기 “펄럭”◇미국“명분없는 전쟁” 역사적 자리매김/총대신 달러·상품무장 재진출
◇베트남“위대한승리” 불구 남은건 황폐화/보트피플 등 후유증딛고 개방물결
1975년 4월 30일 미군헬기가 사이공(호치민시)의 미대사관 옥상에서 마지막 탈출자를 실어나름으로써 베트남에서의 확전을 감행한 미국은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을 맞았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미국 성조기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베트남기가 펄럭이고 있다.
워싱턴에 세워진 베트남 참전 기념비. 까만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5만여 희생자 이름앞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남긴 메모와 한다발 꽃들로 전쟁의 아픔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이 『이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왜, 누구 때문에 죽어가야 했나』를 반문하게 된다. 패전이라는 체면손상보다는 「명분 없는 전쟁」 「통일열망을 가로막은 제국주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자리매김이 더한 아픔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전쟁이 끝나기 하루전인 75년 4월29일, 윌리엄 크레이그 대위와 텍사스출신의 마이클 존 시아 중위등 4명이 11년전쟁의 마지막 희생자들이었다. 크레이그 대위등 마지막 희생자들이 철수작전중 사고로 숨진 헬기승무원들이라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 사이공이 함락된 30일까지 하룻동안은 혼돈과 배반의 미국 최대 치욕의 날이 됐다.
그리고 전후 다시 쓰여진 전쟁사는 「자유민주가치 수호」라는 미국의 최대 명분마저 여지없이 까뭉갰다. 또 개입의 대표적 논리로 전개됐던 월남의 공산화가 아시아의 공산화로 이어진다는 「도미노 이론」도 깨졌다. 베트남에 보름 앞서 75년 4월 15일 캄보디아(크메르)가, 그리고 라오스가 차례로 공산화됐지만 연쇄 붕괴의 칩은 그자리에서 딱 멈춰섰다. 간과한 것은 이념에 우선한 민족주의의 오랜 역사였다. 이념의 팽창주의 대신 중국-베트남전쟁, 베트남의 캄보디아침공등 지역패권주의와 내전의 연속이 빈자리를 메웠다.
베트남전의 종료는 베트남인들에게는 46년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시작으로 30년만에 얻은 값진 승리였다. 오랜 인내와 희생끝에 해방과 더불어 외세에 의해 위도 17도선을 경계로 갈렸던 민족이 하나되는 희열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보복의 칼날을 간 미국의 주도로 전개된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는 전쟁기간중 베트남인 1인당 퍼부어졌던 1천파운드의 폭탄보다도 더욱 무서운 파괴력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황폐해진 국가 재건과 함께 사회주의―자본주의 두체제를 혼합해야 하는 통일정부로서는 월남인들의 재배치, 재교육집단수용소 운영등 되풀이 된 실책이 더 해 전후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백달러가 안되는 지역 낙후국으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보트 피플」 10여만명이 조국을 등져 아직도 5만여명의 난민이 각지를 떠도는 현실은 아물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처다.
미국과 베트남은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달러화와 자국상품으로 무장한 미국인들은 이전 총칼로 완전무장하고도 마음졸이며 걷던 호치민시등 베트남 곳곳을 열렬한 환호속에 활보한다. 양국국민 모두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베트남전은 결국 무의미했던 전쟁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윤석민 기자>윤석민>
◎베트남전과 한국경제/상품·용역수출 등 월남특수로 도약 계기/현대·한진등 거대재벌 성장 발판마련도
월남전은 60년대 한국경제가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65년부터 시작된 국내기업들의 월남진출은 대외진출의 기폭제가 됐으며 많은 기업들이 월남진출을 계기로 부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일수교가 우리나라의 대외교역의 문호를 본격적으로 여는 계기가 되었다면 월남전은 우리 기업들의 상품수출무대를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건설업체들은 월남에서 해외진출의 가능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경부고속도로등 국내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한국 기업인들의 월남진출은 미국원조 및 차관이 급했던 정부와 미국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시작됐다.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 시행초기 외화부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한일협정을 강행한데 이어 제2의 외화획득전략으로 베트남을 선택한 것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파병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와 차관 그리고 상품과 용역수출등 베트남특수의 물꼬를 텄다.
우선 대월남수출이 큰폭으로 늘었다. 64년 6백만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65년 1천4백78만달러로 늘었고 66년엔 수출이 1천3백84만달러였다. 월남과의 무역수지는 엄청난 흑자를 기록해 65년이후 70년까지 6년동안의 흑자규모는 7천만달러에 달했다. 62년 우리나라의 수출대상국 랭킹 9위였던 월남은 65년 1억4천만달러의 수출국으로, 미국과 일본에 이어 3위시장으로 부상했고 그 비중은 전체 수출의 10%에 달했다.
월남특수로 많은 달러가 들어오자 국제수지가 호전되었고 자연히 외국의 차관도입도 순조로워졌다. 66년12월에는 외국의 대한투자를 공식화하는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가 결성됐다. 이후 3년동안 도입된 외자만도 12억달러가 넘었다. 이 외자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도약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월남은 또 국내기업들에겐 해외진출의 경험을 쌓는 산교육장이었다. 미국과 일본이외에 뚜렷한 수출시장을 찾지 못했던 국내 무역업자들은 한국군의 파병을 전후해 월남으로 몰려갔다. 대부분의 무역업자등은 월남특수기간에 전에 없던 호황을 구가했다.
월남특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기업은 건설과 용역업체들이었다. 한국굴지의 그룹으로 성장한 현대그룹의 본격적인 성장도 월남특수와 함께 시작되었다. 현대그룹은 미해군으로부터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한 것을 계기로 각종 공사를 따내 시멘트 자동차등의 참여기반을 마련했다.
월남특수에서 가장 돋보이는 그룹은 한진이었다. 한진그룹은 66년3월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미군사단의 5만병력에 대한 전략물자와 식량등을 퀴뇬항에서 하역해 육지의 각부대까지 수송하는 보급용역을 맡았다. 규모는 당시 단일용역계약으로는 최대였던 7백90만달러. 한진은 이후 71년까지 5년간 1억2천만달러를 벌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가 수천만달러수준이었으니 한진이 번 돈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진은 월남특수를 발판으로 오늘의 거대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 맥나마라 전국방장관 베트남전쟁 회고록 요약/공산화땐 서방안보위협 판단/「미지의땅」 분석없이 정책결정/공산주의운동 민족주의측면무시
베트남전쟁 당시 미 행정부내 「매파중의 매파」로 알려진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78)이 최근 발간한 회고록 「회고―월남의 비극과 교훈」은 30일로 종전 20주년을 맞는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인들의 참회록에 가깝다. 베트남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로 미국내에서 논란을 부르고 있는 이 회고록을 요약한다.
『나는 회고록을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말을 해야겠다는 쪽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미국정부나 지도자들이 베트남전 당시 왜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으며, 우리가 그같은 경험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를 얘기하고 싶은 소망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트남전에 관한 결정에 참여했던 케네디및 존슨행정부 시절의 관리들은 미국이 이제까지 지켜온 원칙과 전통에 따라 소신껏 행동했다. 하지만 우리는 큰 과오를 저질렀다. 당시 우리는 결국에는 상충될 수밖에 없었던 두가지 명제에 따라 움직였다. 첫째는 월남의 공산화가 미국과 서방세계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둘째는 월남만이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으며 미국은 군사훈련과 물자지원에 역할을 국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63년 두번째 명제에 따라 단계적인 미국철수계획에 실제로 착수했으나 월남의 상실이 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당시 나는 월남을 방문해 본 경험이 없었다. 베트남의 역사, 언어, 문화, 가치관등에 대한 이해나 식견도 거의 전무했다. 우리는 베트남에 관한 한 「미지의 땅」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더욱이 행정부내에는 동남아시아 전문가도 없었다. 존 패튼 데이비스, 존 스튜어트 서비스등 국무부내 동아·중국 전문가들은 50년대의 매카시 선풍때 모조리 숙청됐기 때문이었다.
심층적이고 현장감있는 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특히 나는 중국의 의도를 반미선전과 지역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공세의 일환으로 오판했다. 우리는 또 호치민(호지명)이 주도한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정책결정의 기반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61년 가을 월남에 대한 공비침투 사건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고 딘 디엠정권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이 격화했다. 케네디대통령은 맥스웰 테일러 국방보좌관과 월트 로스토우 국가안보회의 요원을 월남에 파견했다. 이들은 귀국후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군사고문단과 장비뿐 아니라 일부 전투병력의 파견까지 포함된 지원강화 방안을 건의했다. 나도 그해 11월8일 이 건의를 지지하는 짤막한 메모를 케네디대통령에게 제시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서두르는게 아니냐는 우려에 따라 러스크 국무장관과 함께 전투병력파견에 반대하는 공동메모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우리들의 분석은 적절치 못했음이 분명하다.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몰랐고 위기를 다루는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쿠바사태, 베를린사태, 콩고사태등 다른 국제적 사건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민권운동으로 시끄러웠던 국내사정을 제쳐두고라도 그랬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슨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베트남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우방에 대한 안보공약을 지킬 능력이 없거나 그럴 의사가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소련과 중국이 헤게모니 장악에 혈안이 돼있다고 믿었다. 월남의 패망은 봉쇄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셈이며 이같은 사태는 막아야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초기에 둘도없이 절친했던 존슨대통령과 베트남전의 종결방식을 둘러싸고 수많은 마찰을 빚게 됐다. 결국 나는 세계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오늘까지도 내가 사직한 것인지, 해임당한 것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아마도 두가지 다였으리라』
◇약력
▲미 샌프란시스코 출생(78) ▲캘리포니아대 ▲하버드 경영대학원▲공군 중령예편 ▲포드자동차 사장 ▲미 국방장관 ▲세계은행총재
<정리=이상석 워싱턴 특파원>정리=이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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