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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수난과 고뇌(법원100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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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수난과 고뇌(법원100년:4)

입력
1995.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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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 폭력 속 좌절과 투쟁 함께…/이승만정권시절 판사 살해협박 시달려/5·16직후 현역대령 행정처장 맞아 “수모”/71·88년 1·2차 사법파동 91년 법대 점거소동 「법원 1백년사」에는 정치권력의 「폭력」이 남긴 치욕적 상흔들이 채 아물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법원사에는 동시에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넘보는 외부의 압박에 양심적 법관들이 때로 좌절하면서도 분연히 일어서 「사법권 수호」를 외친 투쟁의 역사가 함께 기록돼 있다. 시대상황이 암울할 수록 법원의 고뇌도 깊었으나 정의의 「마지막 보루」로 바로 서기 위한 투쟁도 이어졌다. 52년 4월 이승만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요구에 반대하던 서민호(서민호)국회의원이 전남 순천 음식점에서 총을 쏜 육군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검찰이 서의원을 살인혐의로 구속기소하자 국회는 「정당방위」를 이유로 석방요구안을 가결, 재판장 안윤출판사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피란수도 부산거리와 법원주변에 「서의원을 죽이라」는 시위대와 함께 「서의원을 석방하면 안판사도 죽인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안판사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국회 결의에 따라 검찰이 석방만 하면 될 일이라는 의견을 밝혔으나 검찰과 대법원 모두 피하기만 했다. 국회는「무엇을 하느냐」고 재촉했고, 대통령 법률비서도 매일 찾아와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친지들은 「석방하면 너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다」고 충고했다』

 결국 안판사는 서의원의 구속집행정지를 결정, 석방했다. 그러자 시위대가 법원청사로 몰려와 「안윤출을 압살하라」고 외쳤다. 며칠뒤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서의원은 대구고법의 구속집행정지 취소결정에 따라 다시 구속됐다.

 58년 7월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으로 부상한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과 윤길중 피고인등의 간첩및 국가보안법위반등 사건때도 서울지법 유병진판사가 1심에서 간첩죄와 보안법위반혐의에 무죄를 선고하자 시위대가 법원청사에 난입했다. 그 뒤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조봉암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 59년 7월 집행됐다.

 이에 앞서 58년 11월 이대통령은 서민호의원 사건의 안윤출판사와 조봉암사건의 유병진판사의 연임발령을 거부, 두 사람은 법원을 떠났다.

 5·16으로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사법부는 과거의 물리적 폭력대신에 제도적 핍박을 받았다. 61년 6월 대법관직이 대법원판사로 격하됐고, 62년 4월에는 현역대령이 장관급인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63년 6월 서울지법이 서울민·형사지법으로 분리됐다. 여러 명분이 동원됐으나 본질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형사사건에 법원에 효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정권의 의도였다.

 71년 유례없는 「사법파동」이 벌어졌다. 도화선은 검찰이 현직판사 2명을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었다. 「다리」지(지) 사건,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사건등에 법원이 잇달아 무죄를 선고한데 대한 정부의 보복이었다. 이어 유신선포로 사법부는 오랜 암흑기를 보냈다.

 10·26 사건으로 유신이 종말을 고했으나 10·26 사건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낸 대법원판사들이 대거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 격변기에 대법원장을 지낸 이영섭(이영섭) 7대 대법원장은 81년 4월 퇴임하면서 재임기간을 「오욕에 찬 나날」이라고 회고, 침묵하던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이후 사법부는 권의주의 정권의 강압통치와 민주화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참담한 좌절의 시기를 보냈다.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는 저항시인의 절규로 대변되는 국민들의 사법불신이 극에 달했고, 시국사건 재판때마다 「법정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88년 6월 소장법관 85명은 『국민들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대법원의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고 요구, 급기야 김용철대법원장이 사퇴하는 「제 2의 사법파동」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고, 91년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 재판에서는 방청객들이 법대를 점거하돠 최악의 폭력사태가 있었다. 우리 법원의 재판정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모습이 달라졌다. 특히 형사법정의 변천은 정치체제와 인권의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형사법정 변천사의 중심은 검사석(석)의 높이다. 검사가 지금처럼 피고인과 같은 높이에 서기까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일제시대의 법정은 「공판정은 판사 검사및 재판소서기가 열석하여 개정한다」는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판사와 검사 서기가 법대에 나란히 앉도록 돼 있었다. 변호인과 피고인의 좌석은 법대 아래에 있었다.<이희효 기자>

◎형사법정 변천사/검사석 일제땐 법대위치/54년 변호인과 높이 같게 개정/88년에야 피고인과 나란히

 해방후에도 이 법정구조는 유지되다 54년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대에는 판사만 앉고 검사는 법대 아래 변호인과 같은 높이에 앉게 됐다. 당시 검사들은 검사석이 격하된데 반발, 한동안 공판입회를 꺼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검사와 변호인석의 높이는 당초 25㎝에서 15㎝까지 점차 낮아졌다. 그러나 바닥에 있는 피고인석보다는 여전히 높았다. 대법원은 88년 1월에야 피고인석에 검사·변호인석과 같은 15㎝ 높이의 발판을 놓았다. 피고인이 검사와의 「눈높이」 차이로 심리적 위압감을 받던 처지를 벗어나 검사와 대등한 소송당사자로 자신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같은 법정구조의 변화는 사회전반의 민주화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공판정 모습을 사진촬영하려면 재판장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은 73년부터다. 무질서한 취재로 재판의 존엄성과 소송당사자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82년엔 촬영허가시 피고인이나 당사자의 동의를 받도록 요건을 강화했다. 그러나 「법원사」는 「이로써 재판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게 됐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형사사건의 재판광경이 다양한 사진자료로 후세에 남겨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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