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미확립·공론화과정 부재로 혼란 일본에 대중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80년대 초부터 제기된 일본대중문화 수입개방문제는 한일양국간 현안이 된지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정부의 확고한 정책이 없는 상태인채 「왜색문화」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일본에 대한 민족정서, 문화산업에 미치는 영향등을 들어 극력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론과 세계화·개방을 내세우는 적극 찬성론자도 있다. 정책의 미확립, 공론화과정의 부재는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수입개방문제로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일본대중문화는 영화, 비디오, 가요·음반, 만화등 모두 4개 분야.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정서가 뚜렷하고 파급력이 크며 상품성이 매우 높은 분야들이다. 광복 5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이 문제에 대한 여론수렴을 시도한다.【편집자주】
◎반대/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개방여론 진원지는 바로 일본/식민사관 완전청산 안됐는데/수용앞서 주체적 판단 필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빗장을 열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그 여론의 진원지는 물론 일본이다.
자기문화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는 자칫 고립주의로 인한 문화정체와 급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낙오와 도태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오늘날 세계각지에 섬처럼 떠있는 소수종족의 운명이 이를 대변해준다. 반면 자기 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체성 수호의 의지없이 타문화에 경도돼 일방적으로 수용할 때 그 중심문화의 변방으로 탈락해 종속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우리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튼튼히 지키면서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슬기를 발휘해 양극단의 위험성을 극복했다. 양자를 조화시켜 보합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첫째, 대상문화가 선진문화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둘째, 그 문화를 꼭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당위성을 점검했다. 그 결과 수용의 단계에서는 자주적이며 주체적이었지 강요나 강압에 의한 적은 없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문화수입 대상은 조선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일본문화발전의 원동력은 조선문화였다. 포로로 잡혀간 도공을 비롯한 수많은 기능인들의 기술제공,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다량의 약탈문화재, 1611년부터 1811년까지 계속된 조선통신사에 의한 문화전파등이 그것이다.
19세기 서구열강에 의한 세계질서 재편이라는 지각변동은 일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하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황인종 단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동아시아 각국에 군국주의적 침략을 자행했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정치·군사적 무단통치와 경제적 착취외에 우리의 민족문화를 철저하게 파괴, 말살했다. 자신들은 아직까지 천황을 신격화해 국민단결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으면서 조선 국체의 상징이던 왕을 전근대적 전제왕권의 상징으로 매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훼철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전각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조센징」이 아직도 천민의 대명사임에서 알 수 있듯이 망국백성으로 노예로 전락해 잃어버린 민족적 자부심이다. 선진국이었던 우리의 문화역량을 파괴하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른바 식민사관은 아직까지 우리 학계가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제국주의논리가 기본틀이 돼 있는 식민사관은 제국주의가 잔존하는한 유효하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후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한 생존문제 해결에 골몰했다. 이제 훼손된 문화전통과 상처받은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국민적 여망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야 말로 일본을 초조하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일제통치 35년간 심어 놓은 친일파가 사망, 또는 고령화해 사회지도력을 상실했으므로 다음 세대인 청소년에게 문화적 동질성을 확산시켜 반일감정을 희석시켜 보려는 의도이리라. 이미 불법유통되고 있다는 만화·비디오·가요음반외에 영화까지 합쳐 막대한 문화시장을 겨냥한 이중전략임은 물론이다.
일본대중문화가 독약이 될지 영양제가 될지, 아니면 마약이 될 지 곰곰히 따져본 뒤 빗장을 열어도 늦어서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며 개방과 수용은 우리의 판단과 필요에 의해 주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옥자씨 약력
▲춘천출신 ·53세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 국사학과 석사▲동대학 박사 ▲동대학 교수
◎찬성/김우옥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음성적 유입 이미 범람상태/세계화시대 타문화 배척 모순/공식화로 저질문화 제어
80년대초 텔레비전의 아침방송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떠들썩한 때가 있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요즘은 80년대초의 논쟁이 또 다시 생각나는 때이다.
개방을 찬성하는 입장에서 제일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개방운운하고 있는 그 문화는 현실적으로 거의 다 이미 우리에게 개방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유통되고 있는 만화의 거의 90%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가라오케, 비디오 게임기기며 소프트 웨어가 모두 일제이고 일본에서 건너온 온갖 잡지들이 다른 인쇄물들과 함께 서울거리에 범람하고 있다. 위성방송을 통하여 이곳에 가만히 앉아 일본의 대중문화를 24시간 접할 수 있기도 하다. 이제 새삼 개방이라는 용어를 쓰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세계화, 국제화라는 용어를 앞세우고 지금 우리나라는 상품과 문화를 들고 세계에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마치 세계에는 더 이상 어떤 국경도 없는 듯, 지구 전체가 하나의 작은 이웃마을처럼 바뀌어 버린 듯, 지금 우리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우리의 상품과 문화를 팔고 있다. 이처럼 나의 문화는 내보내면서 남의 문화는 안 받겠다는 태도가 가능한 시대인가? 그것도 비밀스럽게 다 들어와 있는 문화가 아닌가?
공식적인 개방은 일본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저질문화의 대대적인 유입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개방이 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저질문화를 걸러내는 공식적인, 그리고 비공식적인 기구들이 있다. 오히려 공식적으로 개방함으로써 이런 기구들의 제어없이 음성적으로 마구 유입되는 나쁜 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저질문화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청소년 보호와 자국문화 보호를 이유로 내세워 반대를 한다. 마치 일본의 대중문화가 들어오면 우리의 청소년들이 곧 퇴폐주의에 빠지고 우리 문화는 그 그늘에서 쇠퇴해 버릴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들과 우리 문화는 이미 몇십년간의 미국문화 유입을 꿋꿋하게 이겨낸 경험을 갖고 있다. 미국문화는 건강한 문화만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 영화관에서는 미국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저질영화들이 쉼없이 상영되고 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찾겠다는 건강한 운동을 펼쳐 왔으며 우리의 전통문화는 어느 때보다 건전한 모습으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은 오히려 우리 청소년들에게 저질문화를 이겨내는 면역을 키워줄 것이며 우리 문화에는 내성이 강한 자생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선별된 고급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의 문화생활은 그만큼 윤택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문화 일색인 우리 문화계가 더 다양해진다는 이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제침략 35년에 대한 국민감정이다. 그러한 국민적 감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정신대에서 꽃같은 인생을 망친 우리의 어머니들, 징용터에서 그리고 싸움터에서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은 우리의 아버지들, 말과 이름과 모든 것을 빼앗겼던 우리들…. 일그러진 과거에 대한 우리의 아픔과 한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문화의 개방과 그러한 국민적 감정이 실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 한번 냉철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김우옥씨 약력
▲서울출신· 61세 ▲연세대 영문과 ▲뉴욕대 연극과 박사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세계본부 이사 ▲서울예전 연극과 교수
◎주요 한일문화교류 일지
▲65.6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서명
▲65.12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발효
▲83.12 제1회 한일 문화교류 실무자회의. 일본대중문화 개방문제 제기
▲90.3 일본, 제4차 한일문화교류실무자회의서 개방 강력요구
▲92.6 한국문화통신사 일본방문
▲92.10 이수정 당시 문화부장관 일본대중문화개방 긍정검토 시사
▲94.3 가수 계은숙 문체부 허가받아 해방후 국내공연으론 처음으로 일본어 가창
▲94.5 일본 고지야마 만스게극장 부산, 대구등 공연
▲94.9 일본극단 「사키」 국립극장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공연
▲95.1 미국적 왜색영화 「가정교사」 공륜심의통과 상영으로 물의, 배우 안성기 일본 오구이 고헤이감독의「잠자는 남자」에 출연계약
▲95.2 공륜, 미국적 왜색영화 「쇼군 마에다」 국내상영 불허
▲95.2 문체부, 한국계 일본여가수 미야코 하루미 국내공연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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