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생 피습 등 연일 “톱”/조·석간속보로 “반독재” 공감대/언론 검열속 「공란보도」로 항거/ 「미증유의 학생 데모로 중대사태」
35년만에 「혁명」으로 지각복권된 4·19를 보도한 60년4월20일자 한국일보 조간의 1면제목이다. 통단컷의 제목아래에는 「2만 학생 경무대앞에서 유혈충돌」이라는 부제가 따르고 경찰관이 시위학생을 향해 서서쏴 자세로 정조준사격을 하고 있는 사진이 왼쪽에 4단으로 실렸다. 그 아래에는 학생들이 수도관을 굴리며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고 있는 사진과 서대문 이기붕씨 집앞의 연좌데모 사진등이 실렸다.이어 2면과 3면에는 「학생데모 수도 서울을 휩쓸어」라는 역시 통단컷아래 시위사진 5장과 서울은 물론 전국 시위상황의 상보가 실렸다. 당시 지면이 4면이었음을 감안하면 고정란을 제외한 지면전체가 4·19기사로 채워진 셈이다.
창간한지 채 7년여가 안된 「젊은 신문」 한국일보가 역사의 현장을 사실대로 용기있게 보도한 기록은 지금도 낡은 신문철안에서 생생히 살아있다.
한국일보는 3·15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된 마산사태에서 부터 사실을 가감없이 보도해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마산사태가 난지 하루만인 3월17일자 조간은 4호활자의 특별사설을 통해 「최내무를 비롯해 전국무위원은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총사직하라」고 용기있게 촉구하고 나섰다.
논설위원이 현장에 급파돼 현장논설을 썼고 정치부장을 팀장으로한 특별취재반이 마산을 누볐다. 마산의 시위군중들은 한국일보 취재차량에게만 길을 열어주었고 취재진이 묵은 여관과 서울본사에는 격려전화가 쇄도 했다.
마산의 분위기는 한국일보를 통해 서울은 물론 전국으로 전파 되었고 급기야는 4·18고려대생 피습사건과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혁명 당일날인 19일자 조간과 석간은 고려대생데모와 피습사건을 1면 머리기사와 2·3면에 상보와 화보로 대서특필했다.
한국일보의 정확한 시위보도와 과감한 지면할애는 국민들에게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분노의 공감대를 확산시켰고 특히 젊은학생들의 의분을 들끓게 했다. 당시 대학생들사이에서는 『신문은 한국일보밖에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오고갔다.
한국일보는 계엄이 선포되고 언론검열이 실시되는 상황아래서도 진실을 보도하고 시국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검열당국이 기사를 삭제하면 이를 다른기사로 채우지 않고 공란으로 내보내는 이른바 「벽돌신문」제작을 통해 사태의 위급함을 독자에게 알렸다.
검열이 처음 실시된 20일자 석간의 경우 1면의 20%와 1면에 실린 사설의 30%가 공란으로 배달되었다. 4·19현장을 특집보도한 3면의 경우는 아예 통단컷의 3분의2가 잘려나간 채 인쇄됐다.
「아! 슬프다. 4월19일」로 만들어진 제목중 「아! 슬프다」가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기사의 반정도와 사진이 모두 날라갔다. 이 면의 편집자주는 「아! 슬프다. 4월19일」로 시작돼 「수도서울은 밤의 검은장막이 내려졌고 무고한 사람들이 우모처럼 죽어갔다」고 절규했다.
이 지면은 4·19혁명이 민의의 승리쪽으로 방향을 잡아 계엄이 해제되고 검열이 풀리자마자 26일자 조간에 그대로 다시 실린다. 「아! 슬프다 4월19일」이라는 통단컷에는 검은색의 만장이 드리워졌다. 만장이 드리운 컷아래에는 검열때문에 실리지 못한 사진 8장이 화보형태로 실렸다.
한국일보가 4·19혁명때 보여준 정정당당하고 불편부당한 사실보도의 정신은 「정직한 신문」을 추구하는 오늘에도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이병규 기자>이병규>
◎하루동안 서울서만 159명 희생/「1960년4월19일」 재구성
35년 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부정선거는 국민의 신뢰를 완전 상실한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당시 18세)군 시신이 발견돼 국민의 분노는 끓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4월18일 국회의사당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생 1천여명이 이정권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이정권의 종말을 고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혁명 당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해 본다.
이날 아침 조간신문의 1면은 검은 상장을 두른듯한 제목으로 고려대생 피습사실을 알렸다. 대학가는 금세 폭발 일보직전의 화약고처럼 달아 올랐다. 서울대 문리대생 1천여명은 상오 10시께 교정에 모여 자유의 종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서울대생들이 원남동 사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동대문과 종로4가, 화신앞 일대에는 이미 동성고 대광고등 고교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교내에서 밤새 시국토론을 벌인 고려대생을 비롯, 건국 경희 국민 동국 성균관 연세 중앙 홍익대생들도 줄줄이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정오께 시청과 국회의사당앞으로 진출했으며 시민까지 가세, 순식간에 10만명이 넘는 군중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인파 앞으로 뛰쳐나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시민들의 시위참여를 촉구하는 혈서를 썼다. 이때 군중 속 곳곳에서 「대통령을 면담하자」「경무대로 가자」는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동국대생이 주축을 이룬 시위대는 중앙청을 돌아 경무대로 전진했다.
경복궁 앞에서 공포와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이들은 하오 1시40분께 경무대 입구까지 진출, 경찰의 최후저지선과 10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 순간 경찰의 카빈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플래카드를 든 선봉대원이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만 21명이 사망하고 1백72명이 부상했다. 하오2시30분 정부는 경비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와 경찰의 발포가 화약고에 불을 지른 꼴이 됐다. 시민들의 구호는 어느새 「이승만정부 물러나라」「이기붕을 타도하자」로 바뀌었다. 하오 2시50분 중앙청앞 경찰무기고와 을지로 사거리 내무부앞등으로 몰려간 시민들에게도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다. 이날 하루동안 서울에서만 1백59명의 꽃다운 젊음이 민주제단에 목숨을 바쳤다.<고재학 기자>고재학>
◎서울대학교학생회 4·19 제1선언문/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을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설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거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족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앞에 농단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력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아래 미친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1960년 4월 19일◎4·19일지
▲4월18일=고려대생 국회의사당앞 시위. 정치깡패들 귀교하던 고려대생 습격
▲4월19일=학생·시민 10만명 경무대앞 시위. 경찰 실탄사격. 하오 5시 서울 부산등 대도시에 비상계엄 선포
▲4월20일=대구 인천 광주 수원 전주 이리등으로 시위 확산. 미국무부 한국 민주화촉구 성명발표. 자유당, 경찰발포 합리화하는 내용의 성명 발표
▲4월21일=장면부통령 10개항 수습책 발표.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 경무대 방문
▲4월22일=해외동포들 이승만대통령 퇴진요구 시위
▲4월23일=장면부통령 사임. 고려대생 피습사건 주모자 임화수 유지광 등 구속
▲4월24일=이대통령 자유당총재직 사임. 이기붕씨 공직은퇴 발표.
▲4월25일=서울소재 대학교수 2백58명 이대통령 사퇴요구 시국선언 발표후 가두시위. 서울시민 1만여명 철야시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한국방문 취소
▲4월26일=서울시민 3만여명 이대통령 하야요구 시위. 부산시민 5만여명 시위. 이대통령 하야.
▲4월27일=허정수석국무위원 대통령권한대행 취임, 개헌후 대통령선거 실시 발표
▲4월28일=이기붕씨 일가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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