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입문… 동편제·서편제 아우른 만능예인/일찍부터 국악부흥에 앞장 무수한 인재 양성 17일 타계한 만정 김소희여사는 학같이 훤칠하고 거북처럼 질긴, 그리고 연꽃마냥 청정한 소리 한평생을 살다 갔다. 옥비녀가 고운 쪽진 머리에 화사한 옥색치마를 입고 열창하는 만정의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인간문화재였던 만정은 우리 소리의 부흥을 위해 병든 몸을 아끼지 않았다. 90년부터 시작된 병마를 무릅쓰고 국악부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던 그는 병색이 완연했던 93년 76세의 고령에도 대한민국국악제를 진두지휘했고 영화 「서편제」에 구음으로 출연, 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심청가의 한 대목에 구음을 붙여 개작한 소리 「떠나가는 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만정은 국악의 텃밭에 울창한 숲을 만들고 떠났다. 명창 성창순 안향련 신영희등 무수한 명창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늦게까지 이름을 날린다는 뜻인 만정이라는 호에 어울리게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살랐던 것이다.
판소리의 고장 전북 고창 흥덕에서 태어난 그는 13세되던 해 명창 이화중선의 소리에 빠져 학교도 그만두고 소리의 길로 들어섰다. 천부적인 재능덕분에 곧 애기명창으로 이름을 날렸고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선생과 정정렬 박동실명창등 당대의 거장들을 두루 사사했다. 조선창극단시절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공연 때문에 동초 김연수명창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은 적도 있다.
그는 54년 국악예술고의 전신인 민속예술학원을 설립, 일찍부터 후진양성에 힘썼다. 72년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미국의 카네기홀에서 공연, 우리 소리의 진수를 소개했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한몸에 아우른 그는 판소리뿐 아니라 가야금, 거문고, 양금, 그리고 서예와 살풀이춤에도 뛰어난 만능예인이었다. 『슬픈 서편제와 우렁찬 동편제가 합쳐져야 소리가 완성되고 사람들이 감동한다』는 그의 말은 후진들이 경청해야 할 유언이 됐다.
『팔순무대에 서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 보이고 싶다』고 했던 그는 끝내 팔순무대에 서지 못했다. 가야금명인 황병기씨의 말처럼 「가을밤의 청아한 기러기 울음소리」같던 육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와 같은 명창이 다시 나오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판소리애호가들을 쓸쓸하게 한다.
그는 21일 상오 9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국악인장으로 영결식을 치른뒤 자신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고향마을로 돌아가 영면하게 된다.
◎「고인 판소리」 애도객 감싸고…/국악박물관에 「만정실」설치… 유품 기증받기로
판소리 인간문화재 고 김소희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18일 이른 새벽부터 국악인등 각계 인사들의 분향행렬이 이어졌다.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 이기택민주당총재등이 보낸 조화가 놓인 빈소에는 고인이 즐겨 부르던 판소리 흥보가가 은은히 흘러나와 조문객들의 애도의 마음을 더하게 했다.
○…고인의 수제자 신영희(54·국악협회이사)씨는 『장단을 기다리며 머리를 숙였다가 가슴깊이 응어리진 소리를 발산하던 고인의 모습은 고아하고 정제된 여성미의 상징』이라고 추모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신씨는 또『고인은 항상 「참된 인간미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강조, 후학들에게 소리꾼의 바른 자세를 가르쳤다』며 애도했다.
○…고인을 10여년간 사사한 「서편제」의 주인공 오정해씨는 『영화에 출연했다고 「소리꾼의 진정한 정신」을 일깨우며 모질게 꾸짖은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며 『앞으로는 판소리에만 전념하겠다』고 다짐했다. 오씨는 『선생님은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고통을 누르며 판소리 얘기를 하셨다』고 전했다.
○…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은 이날 하오 빈소를 방문, 국악박물관에 상설전시관인 만정실을 설치, 고인의 유업을 기리겠다고 유족들에게 약속했다. 이성천 국립국악원장은 만정실에 전시할 고인의 유품을 기증받기로 유족들과 합의했다.
○…「달밤의 기러기 울음소리」로 비유되던 고인의 소리를 물려받은 맏딸 박륜초(52·단국대강사)씨는 『어머니의 뜻을 어기고 판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오랜 꿈이었던 「모녀 공연」을 지난 8일 가질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그냥 가셨다』고 통곡했다.<장학만 기자>장학만>
김영삼대통령은 18일 판소리 명창 고 김소희여사의 빈소에 홍인길 총무수석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선생이 떠나신 큰 자리/누가 메울 수 있으랴”/이보형 판소리학회장
이 시대 큰명창 김소희선생이 저승으로 가셨다. 누구나 한 세상 살다가 떠나가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고 가고 나면 그 자리를 뒷 사람이 메워 나가는 것이 남은 사람의 몫이지만 김소희선생의 자리는 어느 자리로 메울 수 있으랴 싶다. 그러기에는 그리 넓고도 큰 자리인 것을….
나는 90년대에 공연장에서 김소희선생의 소리를 들으며 일제때 어린 시절 마을 큰 사랑에서 유성기판으로 선생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고 놀라워한 적이 있다. 선생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과 같은 명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성기판에 소리를 취입하였다. 30년대 후반 이미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이래로 어느 한 시절 그의 소리가 세상을 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것은 90년대초까지 계속되었다.
송만갑명창이 꿰뚫어 봤듯이 김소희선생은 명창으로 일찍 등용될 여건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천구성」이라 하여 천성적으로 좋은 목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것은 선생도 인정하는 바이다. 둘째 대단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소리 배울 때 주위 동배들보다 몇배나 앞질러 진도가 나갔다 한다. 셋째는 소리공부 욕심이 대단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넷째는 좋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모시고 공부한 명창이 송만갑 정정렬 박동실, 어느 한 분 이 나라의 국창이 아닌 분이 없다.
60년대에 나는 국악을 연구한다고 유성기음반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그 소문이 퍼졌던지 김소희선생이 당시 신촌 하숙집에까지 오셨다. 선배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자 함이다. 선생과 명창들의 소리를 들으며 토론할 기회를 가졌는데 선생은 일일이 소리의 특성을 기록하고 계셨다. 필력이 대단하였다. 일중 김충현에게 글씨를 배워 국전에 입선까지 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회갑기념공연을 가졌다. 전공인 송만갑제 정정렬제 소리뿐아니라 이매방에게 배운 살풀이며 정남희에게 배운 가야금이며 김월하에게 배운 가곡이며 여러 부문에 걸쳐 두루 일가를 이루었던 것을 선보여 큰 감동을 주었다. 이것이 모두 김소희선생이 쉽게 국창이 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의 인품의 원천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결한 거동과 대쪽같은 성품은 흐트러지려는 국악계를 받치는 기둥이 되어왔다.
그가 가고 남긴 빈 자리가 큰 것이 헤아릴 길이 없다. 허전한 마음 가눌 길이 없으매 다만 선생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