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배객·주민 등 천여명발길 넋기려 국립묘지로 승격한 4·19묘역이 17일 공개됐다.
준공식이 끝난 상오 10시 일반인에게 공개된 4·19국립묘지는 4·19혁명 35주년을 계기로 새 단장된 모습을 보려고 몰려든 인근 주민과 추모객등 1천여명으로 붐볐다.
새 국립묘지에는 유영봉안소와 기념관을 비롯해 상징문, 정의의 불꽃, 수호예찬의 비, 자유의 투사등 조형물이 새롭게 건립됐다. 또 낡은 4·19혁명 기념탑은 새롭게 단장됐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손길을 상징하는 10개의 구조물로 구성된 상징문을 지나면 넓은 잔디광장 양끝에 청동조형물 「자유의 투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는 총부리를 무릅쓰고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학생 시민들의 모습, 쓰러진 아들을 부둥켜앉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등이 새겨져 있다.
자유의 투사상 뒤편에는 조지훈시인의 「진혼가」, 김윤식의 「합장」, 유안진의 「꽃으로 다시 살아」등 12편의 추모시가 새겨진 「수호예찬의 비」가 눈길을 끈다.
향내음이 짙게 풍기는 4·19혁명 기념탑 앞에는 노란 유니폼의 다니엘 선교원 유치부 어린이 12명이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담임교사 장은희(27)씨는 『말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바른 교육이라고 생각돼 제일 먼저 찾아왔다』고 말했다.
희생자 2백42명의 영령이 잠든 묘역은 10여군데에만 국화꽃등이 놓여있을 뿐이어서 쓸쓸한 느낌이었지만, 묘지 상단 중앙에 한식 목조건물로 새로 단장된 유영 봉안소에 봉안된 2백22위의 희생자 영정은 젊은날의 모습 그대로여서 향을 지피는 참배객들을 숙연케 했다. 향을 지피던 신형근(86·서울 강북구 수유5동)옹은 『후세들이 이곳을 찾아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고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박희정 기자>박희정>
◎25년간 묘역 보살펴온 강대흥소장/“성역화 계기로 「그날의 정신」도 부활 하길”
『30여년 동안 홀대 받아온 4·19묘역이 드디어 민주화의 성지로 제모습을 찾아 기쁘고 자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25년동안 4·19묘지를 묵묵히 보살펴온 강대흥(58)묘역관리소장은 17일 4·19국립묘지 준공식을 지켜보며 감격과 아쉬움으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71년초 친척의 소개로 묘지 관리업무를 맡아 그동안 혼자서 1만평이 넘는 묘역을 관리해온 그는 국립묘지 승격으로 관리업무가 보훈처로 이관돼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 정권측이 얼마나 무심했던지 건물은 양철지붕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재래식 화장실이 고작이었고 둘레에는 엉성한 철조망 뿐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 일부를 개조, 7식구와 함께 생활한 강소장은 새벽같이 일어나 넓은 묘역을 청소하고 참배객을 맞느라 언제나 녹초가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묘비 앞에서 통곡하는 할머니들과 부상자들의 사연을 듣고 때가 되면 꼬박 꼬박 찾아드는 추모 학생들을 볼때마다 사명감이 솟아났다.
강소장은 『역대정권은 4·19를 「의거」로 격하시키면서 관리에도 소홀했다』면서 『이번 성역화를 계기로 4·19 정신이 되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했다. 정년 3년을 남겨놓은 그는 17일을 마지막으로 정든 묘역을 떠나 소속기관인 강북구청 사회복지과 9급 기능직으로 복귀한다. 일요일도 없이 일해온 반세기를 돌아보며 정년퇴직후를 구상하는 그의 얼굴에 보람과 긍지의 빛이 역력했다.<박진용 기자>박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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