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구대로 수입제도 변경 마음놓고 있다 당해/통상압력 새형태 예고… WTO의 게임룰 익혀야 「썩은 자몽의 공방전」에서 시작돼 「세계무역기구(WTO)제소」로까지 비화한 최근의 한미통상마찰은 두가지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하나는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통상정책에 무차별적인 압력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수입자몽의 양은 고작 컨테이너 3대분으로 이중 컨테이너 1대분이 썩었다. 통상마찰건 치고는 얼핏 「함량미달」로 보이지만 결국 미국은 우리나라를 불공정무역국으로 성토하면서 WTO에 제소했다. 우리나라로선 WTO출범이후 첫 피소였다.
미국 플로리다산 수입자몽을 실은 컨테이너가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은 지난 2월20일께. 부산항검역소에서 17일동안 잔류농약검사를 받고 통관완료되었을 때엔 3분의1가량이 부패돼 있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즉각 『한국의 검역지연으로 자몽이 썩게 됐다』면서 WTO 제4조8항(부패성상품에 대한 신속협의절차)에 회부, 제소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까다로운 검역때문에 통관이 늦어져 결국 상품이 상했으니 한국의 검역소는 일종의 무역장벽이고 결국 WTO이념에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선통관 후검사」카드로 미국을 달랬다. 우리나라의 현행 제도(선검사 후통관)에 문제가 있으니 4월부터 이를 개선하고 검사기간도 종전의 25일에서 5일로 단축시키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했다. 선통관 후검사제도란 채소·과실·어패류 및 물가조절용 식품에 대해선 발암성 농약등만 우선 검사한후 즉시 통관시키고 기타 잔류유해물질은 사후에 견본조사해 문제가 생기면 수입업자로 하여금 회수토록 하는 것이다. 정부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으니 WTO제소의 발동요건은 사라졌다고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미키 캔터 USTR대표는 지난 4일 미상원재무위원회에서 자몽부패사건과 관련,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시장』이라며 한국의 검역제도를 둘러싼 양국 통상마찰을 WTO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방심하던 한국정부로선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정부엔 비상이 걸렸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사안을 제소한데 분노반 당황반의 표정들이었다. 재정경제원 외무부 통상산업부 농림수산부 보건복지부등 관계부처간 긴급협의가 잇따랐고 공식성명을 발표할 것인가, 누가 주무부처인가에 대한 혼선도 일어났다. 그리고 『미국과 쌍무협상은 계속하되 WTO제소엔 불응하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아리송한 대응이었다. 제소가 부당하다면 WTO에서 당당히 시시비비를 가려도 되는데 정부는 굳이 「WTO테두리 밖에서」쌍무협상을 고집했다. 한 당국자는 『이미 검역제도를 고친만큼 제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지만 『WTO제소로 우리나라가 마치 큰 국제적 곤경에 처한 것처럼 비쳐질까 우려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양국간 복잡한 역학관계상 WTO에서 미국과의 맞대결을 피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부는 농민·소비자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통관제도를 고쳐 미국의 트집을 들어줬으면서도 결국 제소까지 당하는 이중수모를 당한 셈이다. 통상외교의 부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제소건으로 WTO체제하에서의 향후 미국통상정책은 어느정도 밑그림이 드러났다. 미국은 과거 쌍무적 관계에 치중해온 통상압력을 이제 가장 미국적인 무역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WTO에서 풀어가려 하고 있다. 쌍무적 통상압력은 「횡포」일 수 있지만 WTO의 틀을 빌리면 「명분」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앞으로 국내적으론 「슈퍼301조」, 국제적으론 「WTO제소」란 두개의 무기로 대외통상압력을 더욱 강력하고도 무차별적으로 펴나갈 전망이다.
미국은 전면강압공세를 강화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도 첫 피소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통상관계가 전개될 새 경기장(WTO)이 마련된 만큼 쌍무적 전략수립 못지 않게 다자간(WTO)게임룰도 익혀야 할 것이다.
◎협상불응론자 견해/“「신속절차」 불수용방침을 오해한것”/통관제도 개선으로 일반협의절차가 적합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해결절차는 미국의 슈퍼301조로 대표되는 선진국의 일방주의를 억제코자 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마련된 것이다. 이는 종전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의 분쟁절차에 비해 패널보고서의 자동채택등 그 기능을 보다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미 의회에서의 우루과이라운드(UR)비준시 WTO분쟁해결절차의 주권 침해여부로 논란이 있었던 것만 보아도, 이 메커니즘이 결코 특정 무역강대국에 특별히 유리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부는 최근 한미 현안의 WTO분쟁해결절차 회부에 대해 불응한다느니, 또는 WTO밖에서의 양자협의에만 응하겠다느니 하고 말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는 정부의 신속협의절차 불수용방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WTO협정규정상 회원국은 어느 나라든지 문제해결을 위해 WTO분쟁해결절차에 회부할 권한을 갖고 있다. 일방 당사국의 협의요청에 대해 타방당사국은 당연히 이에 응할 의무를 진다. 협의절차를 진행하는 방식에는 부패하기 쉬운 식품등 긴급한 경우에만 채택하는 신속절차와 일반절차가 있다. 미국은 우리측이 통관제도를 개선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속절차에 의한 협의를 요구해왔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이유없다고 판단, 불수용방침을 밝힌 것일 뿐이다.
WTO협정은 17개 부속협정을 포함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통상문제의 초점이 과거의 「시장개방」에서 「시장접근」의 문제로 변화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향후 협정해석상 이견과 운영에 있어서의 기술적 문제등으로 회원국간에 분쟁이 빈번히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UR타결로 새로이 다자통상체제에 편입된 농산물 및 위생·검역제도와 관련한 분쟁이 빈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미 무역현안이 WTO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되었다고 해서 양국간 경제·통상관계가 당장 악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차분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우리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국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WTO시대를 맞이하여 유념해야 할 것은 현재 2∼3개의 개별현안을 해결한다 해서 한미통상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역관련 제도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선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동일한 성격의 문제가 끊임없이 재발할 것으로 우려된다.<조현 외무부 통상기구과장>조현>
◎WTO분쟁 해결절차는/피소국 10일내 답변서 제출/양국간 60일내 협의 중재/결렬땐 심판단보고서 이행해야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해말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타결과 함께 탄생한 일종의 「국제경제경찰」이다. 이 기구는 세계 각국의 교역에 관한 제도적 틀을 만들고 분쟁을 해결하며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등 국제기구와 협력, 세계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업무를 맡는다.
WTO는 DSB라는 분쟁해결기구를 설치해 놓고 있다. 즉 한국가의 WTO제소는 곧 DSB에 분쟁해결을 의뢰하는 것이다.
현재 WTO에는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유류부문을 제소해놓고 있고 싱가포르도 석유화학제품의 불공정무역을 이유로 말레이시아를 제소했다. 미국의 제소는 세계적으로 WTO에 제소된 세번째 경우이지만 미국이 상대국을 대상으로 제소한 첫 경우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제소는 서면으로만 가능하고 피소국은 제소후 10일이내에 DSB에 답변서를 내야 한다. 제소사안에 대한 피소국으로서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다. 제소국과 피소국의 입장을 전달받은 DSB는 양국간 협의를 중재하게 된다. 협의는 사안에 따라 협의개시후 30∼60일에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부패상품의 경우 협의시일을 20일로 제한하고 있다. 자몽에 대한 제소의 경우가 바로 긴급협의사안으로 협의기간은 20일로 한정되지만 우리 정부는 이번 사안이 긴급사안이 아닌 것으로 판단, 미국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10일이내에 피소국이 답변서를 내지 않고 협의를 거부하거나 협의기간내 양국간 협상이 결렬되면 제소국은 DSB내 심판단인 패널설치를 요구한다. 국제통상전문가 3∼5인으로 구성되는 패널은 제소사안에 대해 폭넓게 조사를 개시한다. 조사기간은 9개월이하이며 긴급사안의 경우 3개월이내다. 조사를 마친 패널은 보고서를 만들어 당사국에 보고서를 통보하고 이 보고서를 DSB에 제출하며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이 기구는 보고서내용대로 이행하도록 피소국에 통보한다. DSB는 또 이행여부를 감시하며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DSB결정이후 30일이내에 제소국의 보복조치를 승인하게 된다. 보복조치는 일반적으로 제소사안에 대해서만 내리지만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것도 허용된다.
패널보고서에 불만이 있다고 판단하면 피소국은 DSB내 상설상소기구에 상소할 수도 있다. 상소 통보일로부터 60일이내에 상소기구의 보고서가 작성되나 DSB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결국 한 사안이 WTO에 제소되면 제소된 순간부터 절차가 시작되는 것이고 패널설치와 조사, 상소, DSB의 결정등이 모두 마무리되는 기간은 사안에 따라 15∼18개월이 소요된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도 제소국과 피소국간 제소사안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지면 모든 절차는 종결된다. 즉 우리나라가 제소된 자몽의 경우 답변서 제출기한인 10일이내(4월14일)에 한미간 협상이 타결되거나 미국이 패널설치를 요구할 수 있는 협상개시 20일전에 협상이 타결되면 이 사안은 끝나게 된다.<이종재 기자>이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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