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부는 이달초 발표한 「95년판 불공정무역보고서」에서 미국을 「가장 불공정한 무역국」으로 꼽았다. 지난달 미국정부가 「국가무역장벽보고서」를 통해 일본을 불공정무역국으로 비난한데 대한 맞대응이었다. 일본이 이 연례보고서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2년부터다. 80년대말만해도 일본으로선 미국을 겨냥한 이런 보고서의 발간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미국의 끊임없는 시장개방압력과 엔화절상요구에 일본은 항상 저자세였고 설령 굴욕스럽고 불만스러워도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었다.
때문에 보고서발간은 일본이 드디어 미국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다는, 즉 일본정부가 미국에 대한 피해·예속의식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통상마찰이 한층 심화된 올해엔 한발짝 더 나아가 매년 5월이던 발표시점을 한달여 앞당기는 「용기」까지 발휘했다.
며칠전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부(USTR)대표는 우리나라의 검역지연때문에 자몽이 썩었다고 주장,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면서 『한국의 무역장벽은 15년전 일본과 비슷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통상압력 역시 그만큼 무차별적인 것도 사실이고 더 안타까운 것은 15년전의 일본만큼이나 우리정부가 미국에 낮은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압력과 국민건강을 맞바꿀 수는 없다』는 생산자·소비자단체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 1컨테이너분의 썩은 자몽때문에 정부는 끝내 통관제도를 바꿨지만 결국 WTO제소를 막지는 못했다. 다자간 국제무역의 새 틀이 생겼는데도 미국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정부는 「외교적이고 신중한」태도만을 견지한 채 쌍무협상만 고집하려는 눈치다. 미국요구대로 통신시장도 열어줬고 통관제도도 고쳐줬고 다음엔 무엇을 들어줄지 궁금하다.
우리기업도 분명 외국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만 아직 정부에선 「불공정무역보고서」같은 것 하나 발간하겠다는 얘기가 없다. 경제력도 국민의식도 모두 성숙했지만 정부가 「노」라고 말하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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