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국가와 민주국가의 기강의 차이점은 강제와 자유의지의 차이에 있습니다. 권위주의국가의 시민은 국가가 강요하기 때문에 노예처럼 법을 준수하지만 민주국가의 시민은 법을 만드는 과정에 비록 간접적으로라도 참여했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정치학자의 주장이 아니다. 여기에 인용한 말은 필리핀 라모스대통령의 안보보좌관 알몬테(JOSE T ALMONTE)장군이 지난 3월27일 「국가기강회복운동」모임에서 한 연설문의 일부다.
지금 동남아에서는 민주주의와 발전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 뜨겁다. 필자는 4월초 서울국제포럼과 아세안 국제전략연구소(ASEAN―ISIS) 공동주최로 마닐라에서 개최한 제3차 한·아세안포럼에 참가하면서 아세안의 토론의 깊이를 알게 됐다. 그러니까 아세안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체제하에서도 경제발전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필리핀은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보다 뒤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86년 민주화이후 아키노대통령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현했으나 경제적 침체와 사회적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필리핀이 발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싱가포르의 이관유 수석장관은 92년 필리핀 기업인모임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보다 기강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열의는 발전에 해가 되는 무질서와 기강해이를 가져옵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통치하에서 경제성장은 커녕 경제파탄을 초래했던 경험을 갖고 있는 필리핀은 지금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즉 한국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는 체제하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과 대만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고 홍콩의 미래는 중국과의 관계에 달렸지만 싱가포르는 경제수준이 가장 높으면서도 민주화를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적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필리핀의 선택은 싱가포르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근 싱가포르에서 필리핀가정부가 사형당한 문제가 사건 자체의 비중 이상으로 아세안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세안은 내정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묵계하에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필리핀 싱가포르 경우에서 보듯 정부차원에서는 내정문제에 침묵을 지킨다 하더라도 민간차원에서 더 이상 대외관계와 대내문제를 깨끗하게 분리하기 힘들게 되어 가고 있다. 이미 정보는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전파되고 있고, 경제성장의 결과로 국민의 의식화가 불가피하게 되고 있어 민주화문제는 앞으로 경제발전문제와 더불어 아세안의 아젠다(AGENDA:안건·의제)를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한·아세안포럼」에서는 냉전후의 안보문제도 다각적으로 토론되었는데, 기본적인 문제로서는 중국의 잠재적 위협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동남아국가들은 이미 중국과 영토권분규에 휘말려 있는데 최근 중국이 영토권을 시위할 목적으로 몇 개의 섬들에 세워 놓은 구축물을 필리핀해군이 폭파해버렸다.
그러나 중국문제는 현재의 영토분규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세안의 입장에서 보면 동남아지역에 대한 중국의 잠재적인 헤게모니의 그림자가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소련의 위협은 사라지고 미국의 역할은 축소되면서 일본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급성장은 아세안의 장래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 그러나 아세안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모종의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오히려 문제를 더 악회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아세안이 생각하는 것은 중국을 국제질서안으로 끌어 들여 중국의 행동을 완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아세안지역포럼(ARF:ASEAN REGIONAL FORUM)이라는 안보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다자간 대화기구를 만들게 됐다. 그리고 정부간 대화기구와 병행하여 민간차원의 안보협의기구(CSCAP:COUNCIL FOR SECURITY COOPERATION IN THE ASIA-PACIFIC)도 아세안측이 한국, 일본, 미국의 안보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추진하여 2년전에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자간 협의방식이 중국문제를 다루는데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도 아세안과 마찬가지로 안보문제가 민주주의 체제하의 경제발전이라는 아젠다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는 아세안의 관심과 정책에 동반자의 입장에서 깊이있게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과학원장>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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