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7천%대 인플레 두자리로 낮춰 9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된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대통령(56)은 중남미인들로부터 치노체트라 불렸다. 치노체트는 중남미에서 국적에 관계없이 동양인을 지칭하는 치노(중국인)에다 칠레의 군부독재자 피노체트의 체트가 합성된 것이다. 동양인으로 정권을 잡아 독재정치를 펴는 인물이란 뜻이다.
후지모리에겐 불명예스런 이같은 별명은 그가 대권을 잡은지 3년만인 92년 4월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널리 퍼졌다. 당시 그는 군대를 앞세워 의회와 사법부를 해산했으며 1년 6개월뒤인 93년 10월에는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는 새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후지모리는 집권 5년동안 취임 당시 연 7천6백여%에 이르던 인플레를 두자리 숫자로 낮췄으며 경제회생을 이룩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재집권함으로써 최소한 페루 국민들로부터는 권력유지에 급급한 독재자란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후지모리는 지난 89년 대권에 도전할 때만해도 그의 조국인 일본의 덕을 본 게 사실이다. 경제대국 일본이 후지모리가 당선될 경우 페루에 화끈한 재정 지원을 해 줄 것으로 페루국민들은 기대했고 이것이 득표로 연결됐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빗나갔으나 후지모리는 조국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빈사상태의 페루 경제를 회생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가 지난 5년동안 가장 성공한 경제정책은 국영 기업체의 민영화 작업이다. 후지모리정부는 집권후 적자 투성이의 국영기업체 29개를 민영화, 약 26억달러를 투자자금으로 확보했다. 이 액수는 페루 국내 총생산의 8%. 93년 수출총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후지모리 정부는 이가운데 6억달러를 통신분야에 집중적으로 재투자하고 나머지도 학교 신설, 상하수도 및 고속도로 건설등 사회기간산업 확충에 쏟아 부었다.
국가재건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다. 그는 93년 자신이 경영해온 의류사업을 형제들에 넘겨준데 대해 부인 수잔나 히구치여사가 크게 반발하자 별거에 들어갔다. 지난해 8월에는 히구치여사가 자신을 비난하고 스스로 대권도전을 선언하는 「안방쿠데타」를 기도하자 후지모리는 아내와 사실상 결별, 가정은 파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후지모리는 30년대 일본을 떠나 페루의 수도 리마에 정착한 일본인의 2세로 1938년 태어났다. 실내장식업 막노동을 전전한 부모밑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60년 리마농과대학을 거쳐 72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농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까지 리마농과대학 학장을 맡았다.<상파울루=김인규 특파원>상파울루=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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