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현상의 하나는 정신의 황폐화라고 말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근대화는 자아의 자각, 종교개혁, 그리고 인권존중을 핵심으로 하는 이성적·합리적 시민윤리의식의 확립과 밀접한 관련 밑에서 전개됐다. 그리하여 서구의 근대인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화, 우리의 경제발전은 정신적인 개혁이 수반됨이 없이 관주도로 실천되어 왔다. 여기에서 오늘날 충격을 금할 수 없는 갖가지 반인류적·반사회적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는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살펴보면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숭신사상, 외래적이지만 지금은 토착화하여 우리의 정신속에 스며들고 있는 불교, 유교, 도교, 음양오행설등의 종교적·철학적 사상, 그리고 개화기를 전후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한 기독교사상과 주로 농촌과 지방소도시를 배경으로 대두한 다양한 형태의 신흥종교사상들이 주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이중에서 한국인의 정신속에 아직도 뿌리가 깊은 신앙적 요소는 샤머니즘적인 숭신사상과 정감록과 같은 예언사상, 음양오행설과 관계가 깊은 풍수사상, 토속적인 귀신사상등이며 외래적 종교사상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표피에 정착되어 있을뿐, 내면에까지 깊게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범민족적인 보편적 종교를 갖고 있지 못할뿐더러, 한 가족내에 여러 종교적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한 사람의 정신속에 이질적인 종교적 요소들이 혼재하여 형편에 따라 쉽게 믿음을 바꾸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자세는 좋게 말해서 실용주의적이며, 나쁘게 말하면 투철하고 일관성있는 종교적 신념을 결여한 정신적 허약체질자의 안이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신자세는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물질적·세속적 성공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으로 통합을 굳건히 유지하고, 개인적으로 진실된 삶의 의미를 찾는데에는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는 생의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믿음이며, 사람들의 의식구조의 근본을 이룬다. 그것은 흔히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와 영혼의 영원한 존속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에 배치되고 합리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지상주의자들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종교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종교는 사라질 기색을 보이고 있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기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같다. 하버드대 사회생물학자인 윌슨교수는 인간이 수백만년 이상의 긴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무엇인가를 믿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어려운 정신적 동물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존귀한 가치로 강조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사상과 그것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사상도 알고 보면 하나의 종교형태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김일성의 유일사상도 하나의 종교임에 틀림없다. 다만 공산주의사상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입각한 정치체제는 결국 붕괴한 것이다.
서구사회는 탈공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이미 근대화가 성숙하기 시작할 때부터 사회학자들은 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소외현상을 비롯해서 인간의 실존이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됨을 여러모로 지적하여 왔다. 그런 양상이 오늘의 시대에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종교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인민사원과 같은 괴상한 종교단체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옴진리교도 그런 것의 한 형태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한 종교집단들이 적지 않게 활동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이러한 동향에 대해서 정부당국자나 사회지도자들은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정신적 문제는 정부에 의해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정부나 사회지도자들이 심각성을 인식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여건을 조성하면 부정적인 면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사태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호전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한국인은 지난 1세기동안 세계사적인 상황에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처참한 고통을 체험해 왔다. 그 체험을 기반으로 삼고 인간의 본성과 과학적 지식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생의 궁극적 실제의 믿음을 추구해 나가면 한국인은 정신적 허약체질을 강한 체질로 전환시켜 21세기에 웅비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명예교수·사회학>서울대명예교수·사회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