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부대를 비롯한 일본 세균부대는 자신들이 제조한 세균무기를 실전과 대민집단학살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일보가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세균무기준비및 사용죄로 기소된 전 일본군무자 사건 공판자료」에 의하면 세균무기 최초실전 사용은 1939년 3∼9월 몽골의 노몬한지역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소련·몽골연합군간의 전투때였다. 주코프장군이 지휘하는 소·몽군에 대패한 노몬한 출정군의 오기스 리포사령관은 할힌골강을 건너 퇴각하면서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해 731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731부대는 이카리 중좌를 대장으로 하는 특공대를 파견, 강물에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적리균등을 다량으로 살포해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이카리는 대좌로 승진했고 세균부대는 일본군의 「비밀무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39년 소·몽골연합군 상대 첫 사용/731부대 세차례 대중 페스트공격/중 녕파시 60년대까지 “죽음의땅”으로/티푸스균 주입 포로 고의석방, 아이들 겨냥 「감염과자」도
731부대는 또 1940년 5∼7월 중국 중부 닝보시에 출동, 세균공격을 가했다. 1차 출동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에는 이시이 시로(석정사랑) 부대장이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비행기를 이용,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을 대량 살포했다.
2차 출동은 1941년 7월 중국 중부의 청더와 둥팅후일대에 비행기로 페스트가 감염된 벼룩을 살포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731부대 제2부장 오타(태전) 대좌를 중심으로 40∼50명의 특공대가 참여했다. 3차 출동은 1942년 9월 중국 저장성일대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 작전은 「육상세균가해공작」이라는 명칭으로 명명됐는데 731부대원 1백∼3백명이 이시이의 직접 지휘를 받은 대규모 세균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난징주둔 1644(일명 에이)부대까지 참가했다.
○실피해규모 엄청나
일본군은 중국군에 밀려 퇴각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중국군의 수중에 들어갈 각 도시와 마을에 페스트, 콜레라, 탄저, 파라티푸스균을 무차별 살포했다. 우물이나 저수지, 강물, 호수등에 풀어놓은 각종 세균량만도 1백30㎏에 달했다. 또 파라티푸스와 티푸스균을 주입한 음식물을 굶주린 중국군 포로 3천여명에게 먹게한 뒤 이들을 고의로 석방시켰다. 「인간세균덩어리」가 된 이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도 모르는새 무고한 인명을 무작위로 해쳤을 것임은 분명하다. 기록중에는 티푸스균에 감염된 특수제조 과자를 빈집등에 놓아두는 수법도 나오는데 어린이를 겨냥했을 것이 분명한 악마적 수법이 가공스럽다.
가와시마 기요시(천도청) 731부대 생산부장은 법정진술에서 『이 작전의 자세한 결과를 알 수 없었으나 이시이가 「작전은 성공적」이라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세균전의 정확한 피해규모는 산출하기 어렵다. 실제로 페스트균의 집중공격을 받은 닝보시 중심부는 60년대까지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됐다. 당시 한 기록은 『97명의 사망을 확인하고 시내 1백37동의 건물을 불태웠다』고 적고 있는데 이후 잔류 세균에 의한 발병과 전염성, 독성을 감안하면 그 피해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같은 세균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했던 관동군이고 보면 용맹함과 전투력면에서 막강 군대로 통한 명성도 결국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범죄행위가 만들어낸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즉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대신 얻은 괴력」인 셈이다.
○미·영에도 사용계획
대중전에서 재미를 본 일본은 대소전에 대비, 1945년 봄부터 소련과 만주 국경의 산허지방의 하천에 파라티푸스균등을 실험적으로 살포하고 병균을 투입시킨 가축을 풀어놓아 인근지역의 가축들에 대한 전염을 꾀하기도 했다.
일본은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비밀 무기」인 세균무기의 사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야마다 오도조(산전을삼)관동군 총사령관은 법정진술에서 『1945년 3월 육군 차관의 지시에 따라 731부대등에 세균무기 생산을 강화하고 설비와 필요한 전문인력을 보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소련의 검찰 논고에 의하면 일본은 대소전을 벌일 경우 하바로프스크, 치타등 후방 도시에 대대적인 세균전을 펼 계획이었다.
세균무기를 만들기 위해 세균부대가 행한 가공할 만행은 이미 알려진대로이다. 44년 7월부터 종전까지 관동군을 지휘한 야마다 관동군총사령관은 법정진술에서 『731부대에서 생산한 세균무기를 실험하기 위해 실험실내에서 혹은 실전환경과 유사한 조건을 만들어 산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했다』고 밝혔다. 가와시마 생산부장은 『1940년이후 매년 6백여명의 마루타(통나무·환태)들이 생체실험의 희생물이 됐다』고 진술해 731부대에서만 최소한 3천여명의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 몽골인및 만주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731부대에 마루타 감옥이 만들어진 후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1945년 8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공해오자 일본은 자신들의 죄상을 은폐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731부대와 100부대및 지부들을 완전 파괴하고 두 부대의 부대원 전원을 조선의 경성으로 철수토록 했다.
야마다 관동군총사령관은 재판장의 직접 심문에서 『731부대는 중국, 소련, 미국, 영국등 적국들을 세균으로 공격하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후진술을 통해 『세균전 준비를 위해 저지른 악행을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이같은 범죄가 매우 중대해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반인류적 범죄를 시인했다.
○징역 2년∼25년형
당시 소련 재판부(재판장 체르트코프)는 731부대 전범자들에 대해 『일본은 소위 대동아를 건설한다는 환상에 젖어 소련과 기타 여러 국가들에 대해 침략전쟁을 시작했으며 이 전쟁에 세균무기를 사용, 인류를 파멸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이 판명됐다』고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야마다 관동군 총사령관을 포함 12명의 일본군 전범들을 최소 징역 2년에서 징역 25년까지 선고했다.
이같은 형량은 이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범죄행위에 비하면 턱없이 가볍지만 당시에는 증거가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731부대의 연구자료를 넘겨받은 미국등이 이들에 대한 감형을 요청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모스크바=이장훈 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
◎일「세균부대」란/전염병균 대량생산·실전사용 임무… 35∼36년 일왕 비밀칙령으로 창설
「악마의 부대」세균부대는 지난 1935∼36년 히로히토(유인) 일왕의 비밀칙령에 의해 창설됐다. 세균전 부대의 필요성을 지적해온 이시이 시로 육군 군의중장의 설득에 따라 731부대가 구성되고 이시이가 부대장을 맡았다.
세균부대는 이시이가 직접 지휘하는 731부대를 비롯, 사실상 4개의 특수비밀부대로 구성됐다. 이들은 731부대를 중심으로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으나 독자적인 작전권과 작전영역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비밀 유지를 위해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불렸던 731부대는 하얼빈에서 20 떨어진 평방에, 「관동군 군마방역국」이라는 이름의 100부대는 창춘에서 10 떨어진 멍자둔이라는 곳에 각각 설치됐다.
또 1644부대(일명 에이)는 난징에, 8605부대(일명 나미)는 광둥에 각각 주둔했다.
이가운데 「이시이(석정)부대」로 널리 알려진 731부대는 병력이 3천명에 달하는 등 규모가 가장 큰 부대였다. 이 부대에는 모두 8개의 부가 있었다.
제 1부는 페스트, 콜레라, 탄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등 각종 전염병균을 세균전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실시했다. 또 3백∼4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시설을 갖추고 수시로 산 사람들에게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실험부인 제 2부는 연구부에서 나온 세균을 실제로 사용해보는 실행부서였으며 각종 살포용 특수무기도 제작했다. 2대의 중형폭격기를 포함한 특수 비행대와 안다역 근처의 특별 연습장도 제 2부 소유였다. 이들이 제작한 세균살포용 무기로는 이시이의 역작으로 꼽히는 비행기 투하용 자기폭탄을 비롯, 만년필식 분무기, 지팡이식 분무기, 특제 세균포탄, 세균투하용 특수낙하산등을 들수있다. 또 페스트를 전염시킬 벼룩을 번식시키고 탄저병균이 든 초콜릿을 만들기도 했다.
문자그대로 병균과 세균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은 제 4부인 생산부에 속했다. 한달에 페스트균 3백㎏, 탄저병균 6백㎏, 콜레라균 1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종 배양기는 물론 완제품을 보관하는 특수 냉각실까지 두고 있었다.
일본군 세균부대는 철저한 보안속에 베일에 가려진 「유령부대」였다. 731부대의 경우 외부와의 완전차단을 위해 부대주위에 토성을 쌓고 철조망을 쳤으며 부대 상공으로는 아군기조차 날지 못하도록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했다. 외부인의 경우 관동군 총사령관이 서명한 특별 통행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이곳은 자국군에게도 보여주고 싶지않은 「치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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