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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롱(장명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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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롱(장명수칼럼)

입력
1995.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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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초 서울 논현동에서 가구축제가 열렸을 때 친구들과 그곳에 갔었다. 모두들 오래 쓰던 장롱을 바꾸고 싶어서 맞춤 붙박이장도 알아보고, 가구점도 돌아보는 중이었다. 축제 기간에는 할인판매를 했기 때문에 손님들이 북적거렸다. 친구들은 아이들 교육비 부담이 끝났고, 나이도 들었으니 자기자신을 위해서 새 장롱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대개 결혼할 때 혼수로 마련했던 장롱을 삼십여년간 쓰고 있었는데, 식탁 소파등 가족이 함께 쓰는 가구는 몇번 바꿨지만, 「엄마가구」인 장롱은 낡아서 문짝이 안맞는데도 바꿀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공통된 사정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호화사치와는 거리가 멀어서 실용적인 가구를 원했다. 나이든 사람이 쓸 것이고, 이제 새로 사면 우리 평생의 마지막 가구가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디자인이 점잖고 견고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조건이 없었다. 우리는 가구점을 차례차례 돌아보면서 「50대 주부를 위한 장롱」을 골랐다.

 마침내 우리의 마음에 드는 가구점이 나타났지만, 값이 비싼 것이 흠이었다. 나는 거울이 달린 서랍장을 찾고 있었는데, 비교적 괜찮은 것은 1백50만원이 넘었다. 친구들이 원하는 10자·12자짜리 장롱과 화장대 세트는 5백만원 이상이었다.

 『생각보다 값이 비싸구나. 내 장롱을 사는데 어떻게 5백만원을 쓸 수 있겠니』라고 친구들은 뒤로 물러났다. 『문짝이 안맞더라도 당분간 헌 장롱을 쓰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자 우리를 안내하던 중년의 판매원이 이렇게 말했다.

 『저쪽에 있는 젊은이들을 보세요. 혼수를 사러온 젊은이들은 디자인만 마음에 들면 값이 비싸도 삽니다. 같이오신 부모님들도 이왕이면 좋은 것을 사주고 싶어하시지요. 신혼부부도 갖는 장롱을 왜 어머니들이 못갖습니까. 따님이나 며느리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셔야지요』

 그의 말을 듣고보니 가구를 고르는 사람들은 대개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였고, 오래 쓴 가구를 바꿔볼까 하는 나이든 부부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나이든 손님들은 값을 보고 놀랄 뿐 사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았다. 신혼부부는 새인생을 출발하는 사람들이고, 장롱이 꼭 필요한 혼수이니 무리를 하더라도 좋은 것을 사려고 하지만, 중노년의 주부가 무리를 하며 자기장롱을 사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롱사기를 포기하고 차나 마시기로 했다. 한 친구는 부모의 결혼기념일에 장롱을 사드렸다는 기특한 자녀들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나도 그런 날만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오늘의 가구점 풍경에는 자기자신을 끝내 자식의 앞에 세우지 못하는 한국의 어머니들이 있었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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