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발이”천대… 일송금 세금징수/김 사후 백일간 결혼·잔치 못하게/김정일 정면나서지않고 감시·통제 더 심해져 ―북송동포들의 생활은 어떤가.
(오수룡) 『일본에서 북한을 「근심 걱정없이 기와집에서 비단옷만 입고 잘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선전, 그 말을 믿고 입국했다. 그러나 실제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반쪽발이」 「자본주의자」란 말을 들었으며 북한주민에 비해 감시가 심했다. 간첩누명을 쓰고 보위부와 안전부에 잡혀가는 이들이 많았고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차별대우 때문에 마음고생이 컸다』
―일본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송금을 요구하는가.
『조국방문단편에 돈을 가져오거나 은행을 통해 송금하면 세금을 뗀 뒤 전달된다. 북송동포에게 일본친지는 신(신)같은 존재다. 돈 없으면 북한을 빠져나올 수도 없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62년 북송을 택한 동기는.
『재일동포 대다수가 못살던 때 과장선전을 믿고 북송선을 탔다. 청진에 입항하자마자 김일성 숭배교육과 사로청 강습을 받았고 공산대학 강습소에서 3∼6개월간 조선역사 지리등을 배웠다. 대부분 김일성숭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불만이 싹텄다』
―현지 일본인들의 생활은.
『조선남자를 따라 귀국한 일본여자들은 더욱 험한 고초를 겪고 있다. 3년에 한번씩 고향방문을 하게 돼 있지만 돌아오지 않고 북의 실상이 알려질까봐 거의 보내지 않는다. 모두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보위부에 알려지면 고초를 겪게 돼 말도 못하고 있다. 더구나 「행복할 수록 일제시대를 잊지 말자」란 구호를 외치고 있어 일본인들의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하다. 일본에서 부쳐오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평양에서 잘 살고 있으나 그 숫자는 매우 적고 그나마 선전수단으로 이용된다. 60년대초 귀국한 오페라가수 나카다 겐지로(김영길)씨는 고향에 보내주지 않는다고 데모하려다 잡혀간 뒤 소식이 끊겼다』
―탈출한 구체적 동기는.
(오명선)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꿈이 컸다. 군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도 다녀와 보니 「반쪽발이」취급을 받으며 간부승진도 되지 않았다. 아무 희망없는 생활을 계속하다 신의주를 오가는 화교를 통해 남한 이야기를 듣고 탈출을 결심했다. 지난해 9월5일 놀러온 동무 박철만과 함께 같은 달 17일 튜브를 구해 압록강을 건넜다』
―다른 가족을 어떻게 데려갔나. 귀순할 때까지 어떤 생활을 했나.
『중국에서 조선족 동포를 만나 도움을 얻어 살다가 밀수 선박을 구해놓고 다시 집으로 가 부모를 모시고 중국 단동으로 건너갔다. 조선족 동포집에 숨어 살다가 3월께 동남아 제3국의 대사관 도움으로 오게 됐다』
―함남도에서 지도원까지 하다가 탈출하기까지 애로가 있었을 텐데.
(박철만) 『동무집에 놀러갔다가 남한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처자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가장으로 살아갈 바에는 북한사회를 떠나는 게 나을 것같아 결심하게 됐다』
―김일성사망후 식량문제등 사회생활의 변화가 있었는가.
(오명선) 『김정일이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김일성교시의 관철만을 내세워 인민통제나 감시는 더 심해졌다. 식량문제도 더 어려워져 강도질도 서슴지 않는다. 국가에서 배급하는 양으론 한끼도 먹기 힘들다』
(박철만) 『함흥시가 가장 식량난이 심하다. 배급이 끊긴지 3∼4개월됐고 통강냉이도 없어 칡뿌리로 연명하는 사람이 많다. 외화를 벌겠다고 아편을 재배하는 사람이 많아 중독자가 늘고 있고 사망한 사람도 상당수다. 그래서 「교화소에 가면 세끼는 주지 않느냐」며 교화소에 일부러 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데도 김일성사후 많은 사람들이 통곡한 이유는.
(오명선) 『사망발표후 모두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도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분간이 안됐다. 다른 사람들은 각 조직마다 단체로 동상앞에 가 울고불고 하던데 정말 슬퍼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박철만) 『김일성사후 1백일을 애도기간으로 정해 이 기간에는 결혼이나 잔치를 못하게 했다. 내 동무는 김일성이 죽는 바람에 결혼도 연기해야 했다』
―김정일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오명선) 『젊은 사람들은 김정일이 효자라서 장례를 천천히 치른 뒤 집권할 것으로 생각한다』
―남한방송을 자주 듣는가.
(오명선) 『남한과 세계정세를 알기 위해 KBS와 일본방송을 듣는 경우가 많다』
―여만철일가의 남한행 소식을 들었는가.
(박철만) 『소문이 쫙 났다. 대부분 참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김초미) 『20세때 오빠 말만 믿고 귀국했다. 오빠가 원망스럽기만 했고 오직 돌아가고만 싶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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