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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분규(장명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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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분규(장명수칼럼)

입력
1995.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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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필리핀의 산 파블로시에서 거행된 한 여성의 장례식에는 5만군중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의 관이 흙에 묻힐때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었고, 라모스대통령의 퇴진과 근로자 해외파견 중단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4남매를 남겨두고 싱가포르에 가서 가정부로 일하던 그는 주인집 어린 아들과 동료 가정부 한명을 살해한 혐의로 지난 17일 처형되어 싸늘한 시체로 고향에 돌아왔다. 그의 이름, 플로라 콘템플라시온은 필리핀인들의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 사건은 싱가포르와 필리핀사이에 격한 갈등을 빚고 있다. 두나라는 각기 대사를 소환했고, 필리핀의 시위군중들은 싱가포르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싱가포르는 법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콘템플라시온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들이 새로 나왔다는 변호인들의 주장과 선처요구를 무시한채 사형집행을 단행했다는 것에 대해 필리핀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의 시위는 싱가포르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기보다 오랜 좌절과 절망의 폭발이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은 세계에 가정부를 공급하는 나라로 이름난지 오래고, 그들에 대한 인권유린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필리핀 여성들은 부지런하고 교육수준이 높고 영어를 잘하고 상냥하여 가정부로서 인기가 높지만, 구타나 성폭력등으로 희생되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필리핀인들의 해외취업은 정식 허가를 받은 취업보다 불법취업이 더 많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리핀이 공식집계한 해외취업자수는 2백50만명정도지만, 실제로는 5백만명이 넘고, 그 중 3분의 1이 여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해외취업자들의 공식적인 송금은 연20억불로 수출액의 15%나 되는데, 전체취업자들의 송금은 80억불이 넘는다고 한다.

 해외취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필리핀의 최대 외화수입원인데도 정부가 해외취업자들의 인권보호에 소극적이라는 것이 필리핀인들의 큰 불만이다. 과거에 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혔던 필리핀의 자존심은 「가정부의 나라」로 상처받고 있다. 싸늘한 시체로 고향에 돌아온 한 가정부의 비극앞에 수만군중이 울부짖는 것은 이처럼 깊은 좌절감 때문이다.

 80년대에 필리핀인들은 마르코스의 20년 독재와 맞서 싸웠고, 86년 마침내 군중의 힘으로 그를 쫓아냈다. 한 가정부의 장례에 모인 군중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승리를 거두던 그날을 뒤돌아보게 한다. 오랜 독재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경제발전의 승리로 이어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한데, 필리핀인들의 건투를 간절히 빌고싶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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