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부사건의 여파가 심상찮다. 어떻게 살아가는게 바른 길인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모르겠다며 탄식하는 소리가 높다. 흔한게 전통적인 윤리도덕과 가족간의 사랑·신뢰의 실종탓으로 돌리는 푸념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의 소위 지성의 패륜을 풀이할 수 있겠는가. 그게 결코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치솟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게 뭣일까. 종교에서는 윤회와 영생을 삶의 이치이자 궁극의 목표로 들먹이지만 결국은 유한한 생명의 끝없는 이어짐의 과정이 아닐가. 생물학적으론 그런 끝없는 이어짐과 계승을 매개하는 게 유전자이다. 소위 디옥시리보핵산으로 그 정체가 밝혀진 DNA의 존재가 자신의 복제요 분신이랄 수 있는 차세대의 탄생을 가능케하고 고리맺어 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는게 아니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DNA를 남긴다는게 옳은 표현이 된다. 그 DNA를 통해 한 개체의 존재와 정체성마저 승계되는 것이어서 자식을 둔다는 게 누구에게나 삶의 보람이자 대사로 여겨져 온 것이다.
문제는 DNA를 넘겨받은 그 사랑스런 분신이 선대를 살하는걸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다. 외국유학을 통해 최고수준의 교육과 박사학위까지 받은 첨단 지성마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부정할 수 있다는 건 진정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어쩔수 없이 돌연한 「DNA의 역습」사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사람이란 기계인간인 사이보그나 로봇이 아니기에 완벽한 복제생산의 유전자입력이란 불가능하다. DNA란 삶의 끝없는 계승을 매개한다면서도 아무리 정교한 인체컴퓨터로도 모두 입력할수 없는 부분은 자율적응케 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현실적응에 과도히 몰두한 나머지 근원적으로 간직해야할 정체성의 확인·유지기능마저 마비될 수 있는 위기야말로 바로 「DNA의 역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환경파괴로 인한 유전자손상과 변이, 컴퓨터정보화사회의 승부 빠른 삶과 무자비한 경쟁, 인성마저 부정하는 금권만능사회의 아수라장등으로 알게 모르게 DNA의 역습이 시작된지가 사실은 오래다.
암·AIDS등 몹쓸 병의 만연이 유전자변이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다음 세대로 영원히 계승시켜줄 DNA가 순식간에 내부의 적으로 돌변해 공격해오고 있는 위기가 오래전부터 개시되어왔던 셈이다.
육체적 질병차원을 떠나 개인의 정신적 삶의 경지에서도 DNA의 역습은 이미 엄청난 쓰라림과 막다른 선택을 강요해 왔다. 지난 84년부터 일부 지도층 인사들간에 조용히 번지고 있다는 「유산안남기기운동」의 실체란 것도 재산사회환원의 정신과 함께 그런 DNA의 역습과 패륜세태를 비껴가려는 고육지계의 요소도 담겨 있다하겠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육영사업에 희사하려했지만 결국은 살부의 희생이 된 덕원예고이사장 김형진씨의 비극은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자식이란 존재의 덧없음을 피해가려다 오히려 역습의 표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개인차원을 떠나 사회적 차원에서 살펴봐도 DNA의 역습은 또다른 엄청난 문제를 이미 야기시키고 있다. 소위 세대교체와 노인문제의 등장이다.
정치·경제·환경등 모든게 갈수록 더욱 불확실해져 가고있는 각박한 세상에서 세대교체의 바람은 갈수록 거세어만 간다.
노령인구가 불어갈수록 오히려 뒷전으로 밀어내려는 압박은 강해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삶의 질의 세계화」라는 복지화시책도 드디어 등장하기에 이른 시점인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러고보면 실로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덩어리다. 삶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가장 소중한 사람의 매개인자가 각박한 현실에 지나치게 적응·변이한 나머지 그 주인공을 역습하는 엄청난 사태앞에서 우리는 고식적인 사랑과 효도 및 인정타령에 언제까지 매달려야만 하는 것일까.
너무나 달라진 현실앞에서 오늘의 사람들은 삶의 계승 방식과 가족및 인간관계의 재정립이라는 실로 엄청난 과제를 안고 몸부림치고 있다.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난제의 해결없이는 사람의 삶이란 더욱 드라이해 질수 밖에 없다 하겠다.<수석논설위원>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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