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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소와 은행의 차이/문창재 사회1부장(데스크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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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소와 은행의 차이/문창재 사회1부장(데스크진단)

입력
1995.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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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위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소일하는 이들에게서 퇴직후 이런저런 고충이 많다는 하소연을 종종 듣는다. 대표적인 고충은 관청 민원창구에서 당하는 일들이라 한다. 민원사무를 보려고 관청 민원실에 갔다가 절차를 몰라 쩔쩔 맸던 일, 창구직원의 불친절에 분개했던 일등을 털어놓으며 그들은 『우리나라의 세계화는 아직 멀었어』하고 개탄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비서관이나 관계직원을 시켜 무슨 일이건 앉은채 척척 뜻대로 하다가 야인이 되어 당해보니 서민들의 불평을 알겠더라는 얘기들이다.

○“서민불평 알겠다”

 얼마 전 부동산 소유자 주거지 이전신고를 하려고 시골 등기소를 찾아갔을 때 겪은 일이다. 썰렁한 민원실에는 민원서류 용지함과 볼펜을 고무줄에 묶어둔 서류작성대가 있었으나 용지함은 텅텅 비어있었다. 창구직원에게 용지를 달라니 『요 앞에 있는 법무사 사무소에 가보시오』 했다.

 시간에 쫓겨 따져보고픈 생각을 억누르며 법무사를 찾아가니 서류작성료가 3만원이라 했다. 용지를 얻어 살펴보니 작성하기가 너무 어려워 3만원을 주고 대서를 부탁하고 말았다. 용지는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난삽한 어휘와 문장으로 돼있어 3만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서는 발길은 가볍지 못했다. 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민원서류 용지가 없으며, 국민대중을 상대로 한 서류작성이 까다로운 시험보다 어려워야 하는가.

 법무사에게 채권압류신청서 수수료 33만여원을 주었다가 보수규정을 따져 5만6천원을 돌려받았다는 어느 주부의 경험담, 1월 한달동안 서울지법에서 징계처분을 받은 법무사 20여명 가운데 6명이 보수규정 위반이었다는 사실등이 보도된 17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기사는 법원 민원인들이 당한 피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관청의 번호표

 십수년전 일본 연수차 일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1년 체류예정이었으나 6개월비자 밖에 얻지 못해 주거지 구청에 외국인등록을 하러가면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창구 여직원은 바로 뒷자리의 차상급자와 잠시 의논하더니 『비자기간은 6개월 뿐이지만 대학에서 1년재학 허가증을 내준 것을 믿고 규정상 1년이상비자 소지자에게만 내주는 외국인등록증을 발급해주겠다』고 소상히 설명하며 즉석에서 처리해 주었다.

 도쿄거주 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도쿄출입국관리국은 민원인 도착순서대로 번호표를 뽑게 해 차례대로 민원을 처리해주는 공평한 제도를 시행한지 오래다. 그 제도는 즉각 우리 금융기관에 도입돼 은행에 일보러 가는 것이 관청에 가는 것처럼 두렵지 않다. 아무도 새치기나 특정인에 대한 특별대우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 뿐 아니다. 입출금청구서같은 서류들이 모두 쉬운말로 돼 있어 누구라도 쉽게 작성할 수 있다. 글씨 쓰기가 불편해 멈칫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은행직원이 나타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면서 신청서를 대신 써준다. 시골등기소 민원실과 너무 대조적이다.

 관청민원실이 은행처럼 되기를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불편해하는 민원인이 있나 없나 살피다가 쏜살같이 나타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곰살맞게 보살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필요한 용지를 제자리에 비치하고, 그 용지에 인쇄된 난해한 말을 쉽게 고치는 것은 돈도 품도 크게 들지 않을텐데….

○민원개선이 첫째

 행정쇄신위원회 세계화추진위원회같은 기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선진화 세계화는 이런 사소한 대민업무 개선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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