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개혁」미련 보혁파모두 비판/“대선참여 고려”재추진꿈 시사도 지난 85년 3월10일 하오7시30분. 퇴근해서 다차(별장)에 가려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정치국원은 콘스탄틴 체르넨코당시소련공산당서기장의 사망을 전하는 긴급 전화를 받았다. 그는 즉각 정치국회의를 소집했으나 후계자결정은 하루 미뤄졌다. 다음날 새벽3시. 귀가한 그는 아내 라이사와 정원을 산책했다. 라이사에게 『이 나라서 개혁을 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공산당서기장밖에 없다. 중대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서기장직을 맡아야겠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11일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가 공산당서기장으로 취임,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선언한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취임초 매우 제한된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포프전서기장 시절 개혁보고서가 1백2종이나 됐으나 크렘린궁의 금고속에서 사장된 점을 볼때 강경보수파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하지만 86년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뒤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됐다. 이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냉전이 종식되는등 그의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내서는 공산당이 개혁을 거부했고 결국 소련붕괴라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됐다. 공산당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 인물을 등용했지만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멘클라투라(특권층)가 몇십년동안 줄서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90년3월 공산당 권력독점을 포기토록 했지만 이듬해 8월 보수파 쿠데타실패로 당서기장직에서 물러나는 비운을 맛보았다. 외교담당보좌관인 아나톨리 체르나예프는 『안드레이 사하로프박사가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은 민주주의자인가 노멘클라투라인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며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더 일찍 포기했어야 했다』고 페레스트로이카 실패이유를 들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온화하고 유연한 성격이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이유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측근인사를 과감히 숙청하지 못한 인간적 정이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정책추진에 전술적 잘못은 있었으나 자신의 노선은 옳았다고 믿고 있다. 다만 가장 후회하는 건 소련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옐친과 쿠데타주동자들을 계속 비판해 왔다. 또 민족문제가 산적한채 폭발직전이었다는 것을 간과한 점도 자책하고 있다.
그는 국내문제에 침묵해오다 최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페레스트로이카는 보수파에 의해 막혀버렸고 급진개혁파 때문에 궤도를 이탈한 채 중단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조기선거로 민주주의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내년 실시될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유익하다면 고려해 보겠다』고만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좌절된 페레스트로이카를 다시 추진해 성공시켜야 한다는 한이 맺혀있는 듯하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가 자유를 줬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올 64세인 그에게 기회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의 운명은 자신보다는 바뀐 시대의 러시아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모스크바=이장훈 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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