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각/재정책임 한국의견 중시 불가피/북 태도 불변땐 「강경」선회 가능성 미국이 대북 경수로제공 문제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의 수용을 완강히 거부, 경수로 협상은 물론 제네바 북·미합의의 총체적인 이행구도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수로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면 특별사찰이나 폐연료봉문제등 다른 과제들도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제네바 핵합의는 그동안 미국의 국가이익이라는 잣대에서 북핵해결의 최선책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행과정을 논의하는 전문가회의에서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자 클린턴미행정부는 불과 핵타결 3개월여만에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것같다. 북한이 15일 외교부 대변인 회견을 통해 「합의 파기」운운하며 한국형 경수로 수용의 절대불가 입장을 명백히함으로써 미국을 더욱 궁지로 몰고있다.
미국무부는 북한의 이같은 으름장에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태도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제네바합의에 따라 이행한 ▲5㎿원자로 핵연료봉 재장전 중단 ▲50㎿와 2백㎿원자로의 건설 중지 ▲재처리시설(방사화학 실험실)폐쇄등 일련의 핵동결 조치를 다시 원상 복귀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을 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는 눈치이다.
미국의 딜레마는 명확하지 않는 북·미기본합의서 내용으로 어느정도 예견돼 온 것이다. 합의서에 의하면 미국은 국제 컨소시엄, 즉 코리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대표해 북한과 경수로 공급계약을 체결하기로 돼있을 뿐 경수로형은 명시돼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은 현실적으로 울진 3, 4호기라는 한국형경수로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경수로 지원자금의 대부분을 분담할 한국측이 한국형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테이블에서도 이같은 「현실」을 내세워 한국형 수락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도 완강하다.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일 수없다는 태도를 굽히지않고 있다. 어떻게든 한일등 관련국가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해야할 미국으로서는 진퇴양난인 셈이다. 미국은 또 기본합의서 서명에 앞서 김정일 앞으로 보낸 클린턴대통령의 친서를 통해 경수로 제공을 담보했다. 대북 경수로 제공건은 이미 백악관의 체면이 걸린 문제가 돼있다.
미국이 처한 이같은 입장을 반증하듯 일부 외신은 미국이 한국형 경수로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미국기업을 「사업 중개역」으로 선정하는 구상을 추진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앞뒤가 뒤바뀐 얘기」라는 지적이 많다. 현재 문제가 되는 부분은 주계약자를 누구로 하느냐는 것보다 경수로의 모델을 한국형으로 하느냐 아니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현재 한국형 경수로 관철을 위한 뾰족한 복안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으로 전개될 경수로제공을 위한 북·미전문가 회의에서 북한을 설득하는데 주력하되 여의치않을 경우 보다 강경한 기조의 협상자세를 취한다는 것 정도로 관측된다.<워싱턴=정진석 특파원>워싱턴=정진석>
◎정부입장/“「한국형」 명칭까지 관철” 단호/“한국이 중심국역할 변화없다” 자신/끝내거부땐 북핵정책 전면 재검토
북한의 한국형경수로 수용거부와 핵합의 파기위협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한국형경수로의 실체는 물론 명칭까지도 관철되지 않으면 북한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미간 합의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무부가 북한의 중앙통신 보도에 대해 즉각 당국자의 논평을 내고 『한국형이 수용되지 않으면 합의이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북한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북한이 파기를 선언하지 않아도 북·미간 합의는 자연스럽게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북한의 「벼랑끝 외교전술」을 일축해 가며 강력히 대응하고 있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우리가 기술적, 재정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 어느 나라도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할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구태여 경수로까지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국제적 논란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유일한 대안인 한국형을 거부하면 북핵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다고 정부 당국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한국형이 관철돼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인 데 있다. 북한에 대한 경수로제공이 남북관계진전및 북한개방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고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정부가 북·미합의의 필수요소인 남북대화를 합의이행과 연계시키지 않으면서도 한국형 관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 정부는 북한이 한국형을 끝내 거부할 경우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만 할 입장이다. 정부는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북한이 합의를 파기하고 핵시설을 재가동할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오는 22일 윈스턴 로드 미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한을 계기로 이루어질 한미간 고위실무협의에서는 이 문제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고태성 기자>고태성>
◎북한속셈/노형담보 「새 선물」요구 저의/상습 「벼랑끝전술」 점차수위높일듯/한미간 갈등유발 또다른 노림수도
북한은 15일 한국형경수로 채택을 완강히 거부하는 내용의 외교부대변인 회견에서 한국형 경수로를 「트로이의 목마」라고 지칭했다.
이같은 표현은 사실 우리측이 북한 경수로지원 부담을 결정하면서 은유적으로 사용해오던 말이기는 하다. 북한 외교부대변인 회견은 우리측의 이같은 「은유의 뜻」을 미리 읽고 공개적으로 한국형채택을 거부한 것이다. 북한은 동시에 한국형 경수로를 끝까지 요구할 경우 제네바 북·미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위협, 「벼랑끝 전술」의 협상태도로 다시 돌아갈 조짐을 보였다.
정부관계자들은 그러나 북한의 이날 발언이 앞으로 전개될 갈등과정의 서곡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한이 경수로 공급계약이 체결될 오는 4월중순까지 점차 「위협」의 수위를 높여갈 것 이라는 얘기이다.
문제는 이같은 강경태도를 통해 북한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하는 것. 정부내에서는 북한이 경수로의 노형문제를 협상 카드로 삼아 새로운 요구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핵시설 사찰문제로 시작돼 경수로제공이라는 결말을 맺은 지난해까지 북·미교섭과정이 되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북한은 당시 93년 7월의 2차 북·미고위급회담에서 경수로제공을 「기습적」으로 요구, 결국 이를 관철시켰다. 이번에도 경수로 공급을 둘러싼 협상과정에서 새로운 「선물」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의 고위당국자는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면서 경수로 2기로 만족하겠냐는 회의론이 제네바합의 당시부터 있었다』면서 『경수로노형문제를 매개로 북한은 미국에 대해 정치적인 선물을 추가로 요구할 것같다』고 전망했다.
이와함께 북한은 북·미합의의 이행협상을 벼랑끝으로 다시 몰고가면서 한미양국간에 갈등을 유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북한은 16일 김정일의 생일을 계기로 후계체제가 공고하다는 점을 내외에 과시했다. 앞으로는 4월중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통해 추대분위기를 고조시키는등 주석승계를 공식화하는 과정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승계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북한은 새로운 외교적 업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던 경수로의 노형문제는 이같은 업적을 얻기 위한 북한의 새 카드가 돼가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해진다.<유승우 기자>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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