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원 추방·일부 재판회부/110만명이 “옛날 내땅 내놔라” 반환소 250만건 드레스덴대학의 1급기사 한스 볼퍼(56)씨는 『독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쓸쓸히 물었다. 그는 체코의 독일인 거주지역 주데텐란트에서 나치간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지만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뒤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가산을 잃고 추방됐다. 그는 드레스덴대학에서 기계공학분야의 가장 우수한 학자로 꼽혔지만 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공장으로 추방돼 있다가 통일을 맞았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원하던 교수직은 서독출신 학자들과 집권 기민당원이 된 동독인들이 차지해버렸다.
통일후 5년은 동독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청산하기 위한 기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독지역의 재건은 원상회복(RESTAURATION)을 의미한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이같은 과거의 청산이 되풀이돼 온 나라다.
드레스덴은 원상회복의 상징이다. 작센주의 수도인 드레스덴은 「엘베강의 피렌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역사도시. 세계최초로 카메라와 전기기관차가 생산됐던 곳이다. 「공포의 밤」으로 불리는 45년 2월 13일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85%가 파괴됐고 점령군으로 진주한 소련군은 공업시설의 대부분을 반출해 갔다. 통일이 된 지금 츠빙거 궁전등 독일 바로크 전성시대의 웅장한 건물에는 관광객이 붐비고 드레스덴에서 탄생했던 BMW와 아우디등 유수한 기업이 고향으로 돌아와 생산을 재개하고 있다.
독일은 45년간 존속한 「불법국가」동독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법적·경제적으로 단호한 방법을 택했다. 토지와 건물등 모든 부동산에 대해서는 철저한 원소유자 반환의 원칙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동독지역 부동산에 대해 일시에 1백10만명이 2백50만건의 반환소송을 제기했고 94년말 현재 이중 35%만이 해결된 상태다.드레스덴 중심가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아파트들이 불이 꺼진 채 방치된 반면 엘베강 하류의 고급주택가는 말끔히 단장, 서독에서 온 입주자들이 살고 있다.
이와 함께 독일은 구동독 공산당(SED)당원을 학교를 포함한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하고 2백만명 가까운 동독 공직자중 20%만을 재임용했다. 외무부의 경우 기술하위직을 제외한 외교관 전원이 해임됐다. 동시에 독재체제하에서 자행된 범죄행위를 형사처벌하기 위해 조사를 벌여왔다.
수도 본의 연방의회 산하 「구동독 과거 청산위원회」에서는 조사관들이 동독의 당료, 법관, 슈타지(비밀경찰)등에 대한 자료에 파묻혀 고개를 들 줄 모른다. 사무총장 디트리히 렘베르크박사는 『94년 6월 1차 종합보고서를 제출할 때까지 3년간 2만쪽에 달하는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다』면서 『그러나 독일처럼 정치적 변화가 많았던 나라에서 범죄자의 낙인을 찍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베를린장벽을 넘다가 숨진 6백여명에 대한 살인혐의를 비롯, 과거범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내에서는 과연 처벌이 능사인가 라는 회의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에곤 크렌츠전서기장과 쿠르트 하게르 전이념담당서기등 최고위급간부 7명에 대해 3년째 진행중인 재판도 좀처럼 판결이 나지않고 있다.
리하르트 바이츠제커전서독대통령을 비롯한 인사들이 형사기소된 인물들뿐 아니라 비밀경찰의 협력자란 이유로 공직에서 추방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사면운동을 벌이고 있다.
구공산당 불법행위에 대한 소멸시효가 93년으로 만료되자 독일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 시효를 95년말까지로 연장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과거에 대한 심판」이 완료될 것같지는 않다. 독일은 철저히 원상을 회복하고 완전하게 시비를 가리려다 더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드레스덴=유승우 기자>드레스덴=유승우>
◎「구동독 과거청산위」 마를리 얀센 사무차장/“청산작업의 목적은/복수아닌 과오반복 방지/여론은 화합으로 기울어”(인터뷰)
마를리 얀센 「구동독 과거청산 위원회」 사무차장(사진)은 『공산잔재의 청산은 복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학교수 출신으로 통일전 내독성에 15년간 근무했던 그녀는 『독일의 여론은 단죄보다 화합으로 기울고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구성된 이유는.
『구동독정권의 잔재를 인적·법적·도덕적으로 청산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독일국민이 실망했다.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의 고난을 공개하고 다시는 그같은 정권이 등장하지 않도록 경험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92년 3월 정치적 폭력의 사례를 모두 들춰내고 피해자를 구제하자는 목적에서 이 위원회가 연방의회 산하기관으로 출범했다』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32명의 의원과 주로 대학교수들인 11명의 전문가등 43명의 위원으로 시작됐다. 산하에는 구동독의 국가권력·융합·형사처벌·국제관계·종교·반체제활동등 각분야의 전문위원회가 있어 각 6∼7명씩의 전문가들이 위촉돼 있다. 이들중에는 구동독의 정치범으로 서독에 인도된 사람들도 있다』
―그동안의 활동은.
『1백45개의 연구과제를 받아 3백27명의 증인을 채택하고 44회 공개청문회를 열어 94년6월14일 연방의회에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단 우리의 목적은 공정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지 형사적으로 처벌하거나 공식적인 역사를 기술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법부와 역사가들의 몫이다』
―구동독 권력자들을 처벌하는데 대한 여론은.
『많은 사람들이 5년만에 흥미를 잃기 시작하고 있다. 슈타지(비밀경찰) 기관원은 8만5천명, 협력자는 수십만명에 달했고 공산당원은 2백만명이 넘었다. 이들 모두의 공과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합을 위해 사면을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면(AMNESTY)이지 망각(AMNESIA)은 아니다』<유승우 기자>유승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