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고 싶은 미술학교는 독일의 바우하우스였다. 그 학교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나 클레등 세계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대가들도 이 학교에서 가르쳤다. 내가 정신주의자로 부르는 선생은 머리를 빡빡 깎고,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닌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꼭 맨손체조를 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실기시간에는 정신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 두 손을 다 써서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그는 소림사의 수도승들이 신체단련을 통해 도에 이르듯이 그림그리기를 통해 도를 깨닫고자 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져 있다. 그 긴장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지 모르는 미지의 자극에 대한 기다림이다. 준비, 대기상태, 성실히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선생님 중에는 일상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묻는 분도 계셨다. 광선물리학자처럼 먼 산은 청색으로 보이는데 가까운 산은 왜 녹색으로 보이는지, 여름철 뭉개구름의 윗 부분은 윤곽선이 뚜렷한데 아랫부분에서는 왜 윤곽선이 녹아버리는지 등 온갖 질문을 해댔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다 즐긴 후 틈나면 그림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선생이나 학생이나 모두 학교에서 살았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색에 빠졌다가 해가 지면 중단하고 집에 가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그리기를 시작하면 수십시간, 수백시간이라도 계속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19년 세워진 이 학교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5년만에 없어졌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자유롭게 행해지는 교육이 주민들로부터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축출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그 뒤에도 캠퍼스를 2∼3차례 옮겨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결국은 완전히 폐쇄됐다. 하지만 이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현대 공예와 건축을 형성시킨 20세기 기능주의의 주춧돌이 됐다. 바우하우스학교는 없어졌지만 바우하우스정신은 아직도 면면이 살아 있는 것이다.김점선<서양화가>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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