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는 불타고 있었다. 전기도 가스도 수돗물도 멎었다. 전화조차 불통이다. 도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채 시민들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대형 트럭, 엿가락같이 휘어진 고가도로의 잔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보이는 끔찍한 지진이었다.
지진이 발생한지 사흘. 시내에는 길고 질긴 줄서기가 시작됐다. 공중전화와 자동판매기 앞마다 행렬이 한없이 늘어섰다. 고베를 탈출하는 자동차 행렬도 기러기떼처럼 줄을 이었다. 고베의 자랑거리 야경도 정전으로 빛을 잃었다.
이번 지진을 보는 일본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다. 철저한 방재태세를 자랑해왔던 지진대책에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해 로스앤젤레스 지진 당시 두동간난 고속도로를 놓고 『일본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고』라고 자랑하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진도 8에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돼 있다던 고가도로가 진도 7.2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초기진화의 실패, 더 큰 참화를 부른 화재대응 미비도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지진 발생후 고베 시민들이 보이고 있는 극기의 대응자세는 칭찬할 만 하다. 생필품이 달리고 있지만 사재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가뭄에 콩나듯 문을 연 빵집 앞은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지만 혼잡은 없다.
40대 빵집 여주인은 방금 구워낸 따뜻한 빵을 한 사람당 5개씩으로 제한해 모양좋게 팔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한 청년은 『지진은 일본에 사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며 참혹한 재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폭군 네로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로마시내를 불태웠다지만 대자연은 무엇때문에 고베를 지옥의 불바다로 만들었을까. 아수라장의 지진현장을 돌아다니며 이 의문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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