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연극과 관객의 함수 세계화 원년이라는 기치 아래 열린 새해 벽두에 시대의 변모를 대변하는 두 편의 진중한 연극이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사회와 시대에 대한 고민은 이쯤에서 끝내도 좋은 걸까?
지난해 말 흥미 위주의 연극들이 범람하는 속에서 극단 성좌가 올렸던 「불지른 남자」는 민주화에 대한 80년대의 열정과 희생이 문민정부하에서 과연 더 나은 사회로 열매맺고 있는지 반문한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소재로 한 「불지른 남자」는 10여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방화범 재현이 그동안 변한 사회를 짚어가다가 과거가 더 좋았다는 치매증 노인들에게 타살되는 내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주인공의 성격 묘사가 애매하긴 하지만 이강백 특유의 희극성과 사회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불지른 남자」가 80년대 흑백논리의 앙금을 드러냈다면, 극단 산울림에서 지난해 연말부터 해를 넘기면서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거미여인의 키스」는 우리에게 다양한 가치관의 수용을 속삭인다.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피그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반정부운동으로 감금된 정치범 발렌틴과 동성연애라는 죄목으로 갇힌 몰리나가 한 감방에서 만나 갈등과 화해를 거쳐 결합하는 과정과, 권력의 음모안에서 희생되는 그들의 운명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동성연애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정치·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던 이념의 시대를 벗어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면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후기산업사회의 욕구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감방의 한 벽을 헐어내어 마치 우리안에 갇힌 두 인물의 생활을 엿보는 듯한 박동우의 무대장치는 희곡의 상징을 훌륭하게 제시한다. 폐쇄공포적인 공간안에서 안석환과 남명렬 두 배우는 차분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대사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주며 극을 이끌어 간다.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면 시대를 보는 관점은 어떠하든지 마음놓고 즐길 일이다. 그러나 재미와 감동을 통해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중을 정확하게 알아채는 능력 또한 힘써 길러야 할 때이다. 가치중립적인 예술이란 없고, 모든 예술은 수용자의 의식과 감정에 영향을 주면서 만드는 이들의 생각에 귀기울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영화나 TV 속의 스타들을 숭배하는 일에 싫증난다면 연극 공연장으로 나들이해 볼 것을 권한다. 그 엄숙한 제의의 무대로, 진솔한 토론의 장으로, 그리고 관객과 배우가 숨결과 눈길을 주고 받는 살가운 교감의 공간으로.<연극평론가>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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