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같은 희생자 다시 없어야”/고향가족 가정형편 어려워 쓸쓸한 양로원 생활/“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비인간적 자세에 치떨어” 올해 광복 50주년을 남다른 감회로 맞는 사람들이 있다. 92년 9월이후 3차례에 걸쳐 영주 귀국한 사할린동포 1백51명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강원 춘천군 서면 안보리의 「사랑의 집」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 「대창양로원」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귀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고향에 뼈를 묻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에 기쁜 마음뿐이었지만 올해 고국에서 맞는 광복50주년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사할린에서 92년 9월 귀국한 김갑용 할아버지(76)는 광복 50주년을 맞아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42년 결혼한 그해 젊은 아내를 남긴 채 강제 징용당해서 갱부로 일하다가 길이 막혀 50년을 기다려야 했다. 벅찬 감회속에 조국에 돌아왔지만 아내와 가족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 아직도 양로원생활을 하고 있다.
보조기구가 없으면 걷지 못하고 말할 기력조차 없다는 김연옥 할머니(76)는 한 시기 민족의 불행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43년 징용간 남편을 찾아 사할린에 갔지만 그 남편은 광복되기 4개월전 일본인에게 맞아 죽어서 어느 야산에 묻어야 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자신이 일나간 3일 사이에 두아이는 굶어죽어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사할린동포들은 가족을 그리며 돌아왔지만 아내도 자식도 옛날 그대로는 아니었다. 헤어져 살아온 가족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함께 살 수도 없었다.
93년 4월 53년만에 귀국한 김종수할아버지(78)는 경남 고성군 구만면에 살고 있는 아내를 만나 살았지만 어려운 생활속에서 1여년만에 아내가 숨졌다. 고향생활이 너무 힘들어 김할아버지는 지난해 7월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갔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중 이렇게 「정신적 유배생활 」을 하다가 24명이 작고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사할린동포들을 또 슬프게 하는 것은 지금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이다. 강제로 잡아가서 사할린 탄광으로 내몰았으면서 전후 책임을 지지 않고 팽개쳤고 아직도 보상문제에 입다물고 있는 비인간적 자세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춘천=배국남기자>춘천=배국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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