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IBRD)은 지난해 12월 20일 한국에 대해 부산폐수처리장건설등 2건의 차관지원을 승인한 뒤 차관수혜국 졸업을 선언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차관자금을 빌려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는 한국을 개도국으로 대접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이제 중국 러시아 동남아등 후발개도국에 차관을 지원하는 입장으로 변했다. 하찮은 미국물건 하나에도 감지덕지하던 50년전 광복당시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광복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었지만 「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산업은 피폐해 있었고 보릿고개는 여전했다. 6·25는 여기에 치명타를 가했다. 50년대말까지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황무지 그 자체였다.경제발전의 드라마는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구체화되기 시작됐다. 개발독재는 무에서 유를 창조,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선성장, 후분배」를 기조로 한 개발독재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지만 우리경제를 30여년만에 선진국문턱에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88년에 개최된 서울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지금은 뉴욕 도쿄 런던등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한국기업의 광고간판이 눈에 띄고 「MADE IN KOREA」를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은 내년에 선진국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예정이다.<이백만기자> ◎수도권 인구 이백만기자>
50년전만 하더라도 서울사람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면서 한국인의 절반 가까이가 수도권인구다. 서울이 주변도시를 마구 흡수하면서 수도권과 서울의 차이도 사라졌다. 한국이 서울이고 대한민국이 「서울공화국」이다. 이제 서울은 지자제 실시와 국제화 추세에 맞추어 국내적으로는 지방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한 한국속의 서울로, 국제적으로는 세계적 도시로 변화해 가야 한다.
◎발전능력
1898년 국내에 첫선을 보인 전기는 이제 한 시각도 없으면 안되는「생필품」이지만 광복 당시에는 귀한 「자원」이었다. 당시 남한 발전량은 7억1천만㎾. 수풍댐을 보유한 북한의 송전에도 그 정도였다. 그래서 64년까지 제한송전이 실시됐다. 94년현재 발전량은 1천4백44억㎾. 50년동안 발전능력이 2백3배 늘어났다. 「양」문제를 극복한 발전사업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전기를 생산해내는 「질 향상」의 과제를 안고 있다.
◎농촌인구
공업화와 함께 농촌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농촌은 대혁명을 겪어야 했다. 농가가구수는 6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 93년에는 1백59만가구가 됐다. 농가인구는 더 빠른 속도로 감소, 93년에는 전체 인구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3%로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농업개방이라는 태풍마저 몰아닥쳐 농민들의 소외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도로건설
경제의 핏줄인 도로의 길이는 6만1천. 해방당시 1만6천였던 것이 3공화국이 경부고속도로 건설등 도로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70년엔 4만로 늘어났다. 이후 정부가 사회간접자본확충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도로확장은 정체됐다. 정부는 2020년까지 46조원을 들여 6천1백를 건설, 전국을 「반나절생활권」으로 만들겠다고 지난해 6월 발표했다.
◎해외건설수주
우리에게는 월남전과 중동특수라는 두 차례의 큰 외화벌이가 있었다. 월남전에서는 군인들의 피로, 중동에서는 건설노동자의 땀으로 우리는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우리 경제에 단 비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건설로 대표되는 중동특수는 석유파동으로 휘청거리던 한국경제에 「오일 머니」를 수혈,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 건설업체는 성수대교 붕괴로 국제적 위상이 실추되는등 시련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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