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동안 크고 작은 공사장 근처를 지날 때마다 요란하게 써붙인 표어가 늘 눈에 거슬렸다. 그 표어는 「94년부터 부실공사 추방 철저」라는 것이다. 94년부터 라고? 그전에는 부실공사를 했다고 인정하는 소린가? 저런 낯 뜨거운 표어를 써붙이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누굴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 표어는 올해초 건설부와 건설업체들의 간담회에서 각 공사장에 써붙이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표어를 써붙여야 무슨 일을 하는것 같은 의식도 문제지만, 더 우스운것은 「94년부터」라는 사족이다. 그 사족은 새로운 각오를 인상깊게 전달하기는 커녕 그동안의 부실공사에 대한 공포와 불쾌감을 증폭시킨다. 군소회사도 아닌 유명 건설회사들이 저런 표어를 내걸수 있을만큼 뻔뻔스럽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94년이 다 저물어가는 마당에 그 표어를 들먹이는 이유는 그에 못지않게 무신경하고 어이없는 말이 최근 정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영덕국무총리 주재로 14일에 열렸던 중앙안전점검통제회의는 신도시 아파트·도시가스·지하철과 전철·중요시설물등에 대한 안전대책을 논의했는데, 그중 거슬리는 대목은 『수도권 아파트를 정밀조사하여 문제가 발견되면 보강 또는 재시공 하겠다』는 부분이다.
부실공사추방 다짐처럼 이 결정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또 무슨 사고가 터질지 불안해 하는 국민을 진정시키고, 부실공사 의혹이 고조되고 있는 신도시 아파트를 철저하게 조사하기로 한것은 당연한 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지 이삼년된 아파트들에 대해 「재시공」운운 한것은 경솔하기 짝이 없다.
「재시공」이란 말은 신도시 아파트에 대한 의혹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바닷모래와 불량 수입 시멘트를 사용했다는등의 소문으로 걱정하던 주민들은 일산 아파트의 주차장 기둥 균열소동을 겪으며 가뜩이나 불안해하고 있는데, 정부가 재시공의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고 있다니 얼마나 기막히겠는가.
89년부터 95년까지 주택 29만2천호를 건설하려는 5개 신도시 계획은 단기간의 무리한 목표설정으로 자재와 기능공 부족이라는 심각한 파동을 낳았고, 그로인한 부실공사 의혹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 계획은 6공이 세웠지만, 새정부 출범이후 부실공사가 진행됐다면 그것까지 모른척 할수는 없다.
「94년부터」라든가 지은지 이삼년된 아파트를 「재시공」하겠다는등의 말에서는 한국어 구사능력의 부족, 양식의 부족뿐 아니라 이 정부는 과거의 일들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의식이 엿보인다. 좀 더 세련된 국어의 구사, 좀 더 사려깊은 자세가 아쉽다.<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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