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수궁 본궁으로 삼고 방사상 도로 추진/이태진교수 주장,개화파 시행설 뒤집어 서울의 근대적인 도시계획을 수립해 시행한 주체는 개화파가 아니라 고종(1863∼1907)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이태진서울대교수는 17일 한국근현대사연구회(회장 유병용·강원대교수) 월례발표회에서 발표될 「대한제국의 수도 개조사업」이란 논문에서 『고종이 아관파천 중 근대적 의미에서 한성(서울)의 도시계획을 입안해 대한제국 전반기인 1896년 10월부터 2년여 동안 시행에 옮겨 한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서울의 근대적인 도시개발은 개화파 인물인 박영효(1861∼1939)가 김옥균(1851∼1894)의 「치도론」에 따라 입안·시행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교수는 고종실록과 한성판윤 이채연등 주요인사의 인사이동을 비롯한 관련자료의 분석 결과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교수에 의하면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을 본궁으로 삼고 이 본궁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를 건설한 뒤 그 도로들이 다시 종로, 남대문로등과 환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고종은 이를 위해 경운궁을 증축했으며 경운궁 서쪽에 왕립도서관(현재 미국대사관 서쪽)을 세우고 시민공원 성격의 탑골공원과「퍼블릭 파크」(현재 미국대사관 남쪽)도 조성했다.
이 도시계획의 핵심은 본궁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고종은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896년 9월4일 경복궁에 있던 진전(선왕의 초상화등을 모시는 방)을 경운궁 별전으로 모셨다. 고종은 1897년 2월20일 경운궁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자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와 이 궁으로 환어했고 이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의 개발사업은 이후 진행된 서울의 도시개발 계획의 근간으로 존중됐다.
이교수는 『한성개발은 기울어가던 국가를 재건하려는 고종의 일관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개화파의「서도서기」가 아니라 「동도서기」사상에 바탕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정신과 물질문명을 모두 본받자는 개화파의 근대화방법론이 「서도서기」론이다. 고종은 그러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서양의 물질문명은 받아들이되 정신은 우리 것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견지했다.
이교수는 『한성의 근대적인 도시개발은 한성의 위상 회복을 위한 지방 행정조직 개편으로 시작돼 대한제국의 선포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성의 위상회복을 국가재건의 초석으로 인식한 고종은 한성부의 위상을 23부 중 단순한 하나의 부로 전락시킨 23부제(친일 갑오내각 입안)를 폐지하고 13도제로 원상회복시켰다.
고종은 재정확보를 위해 총세무사로서 정부재정의 충실화에 기여한 맥레비 브라운을 1896년 7월12일 모든 예산지출의 서명권을 가진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해 사업의 재정지원을 전담하게 했다. 또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1841∼1904)을 수행하면서 미국수도 워싱턴의 도시행정을 깊이 연구한 이채연을 이해 10월초 한성판윤으로 발령해 「한성개발」의 실무주역으로 삼았다.【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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