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요즘 매일 그리고 종일 비가 내린다. 부슬비나 안개비다. 늦가을 우기로 접어 들어 햇빛보기가 힘들다. 자살이 급증할만큼 파리의 늦가을과 겨울은 우울하다. 서울보다 춥지는 않지만 바람은 뼈속 깊이 스며든다. 샹젤리제거리의 마로니에는 큰 잎을 다 떨구었다. 포도에 깔린 낙엽을 문어발같은 흡입기로 거침없이 빨아들이는 낙엽청소차가 파리의 우수에 젖어들고 싶어하는 철지난 관광객들에게는 야속하기만하다.
그러나 파리의 낭만은 수많은 도심공원과 공원묘지, 외곽의 숲에 있다. 여기에는 단풍이 불타고 낙엽이 지천이다. 파리에는 어느 동네를 가든 기가 막힌 공원들이 있으니 서울처럼 구태여 낙엽의 거리를 지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파리시를 허파처럼 감싸고 있는 볼로뉴숲과 벵센숲은 서울의 몇개 작은 구를 합친 것보다 넓다. 파리시민 2백50만명이 다 들어가서 놀 수 있다. 빽빽이 들어선 키 큰 나무사이로 자전거 전용 오솔길이 나있다. 군데군데 성과 호수, 어린이놀이터, 동물원, 경마장,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들이 분위기를 돋군다.
늦가을 파리의 진수는 그중에서도 공원묘지이다.파리시내에만 몽마르트, 몽파르나스, 페르라세즈등 3개의 큰 시립공동묘지가 있다. 공동묘지가 이렇게도 아름답고 시민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파리는 보여준다. 비석과 나무와 낙엽, 꽃들사이로 파리시민의 사랑을 받은 이브 몽탕과 에디트 피아프, 사르트르와 카뮈, 발자크, 플로베르, 쇼팽등이 누워있다.
파리의 늦가을 풍경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겼다. 미테랑의 숨겨놓은 딸이야기이다.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기전 바람을 피워 낳아 지금까지 엘리제궁에서 함께 살아온 20세의 딸과 다정하게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사진이 파리마치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파리의 여론은 비난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비난의 표적은 놀랍게도 혼외정사로 자식을 낳은 대통령이 아니다. 정치인의 사생활을 특별한 이유없이 폭로한 파리마치지는 다른 언론과 여론에 실컷 두들겨 맞았다. 프랑스의 확실한 여론은 공인의 사생활이 공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한 사생활은 보호돼야 한다는 쪽이다. 지극히 「프랑스적」인 개인주의의 발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남의 행복권도 존중하고 정치인이기에 앞서 한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있다.
현재 프랑스의 가장 큰 관심은 내년 4월의 대통령선거이다. 정치판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파 최대정당인 공화국연합(RPR)의 당수인 자크 시라크파리시장은 지난주 출마를 공식선언, 기선을 잡았다. 우파의 대통령후보를 놓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고 국민적 인기가 더 높은 에두아르 발라뒤르총리를 따돌리기 위한 것이다.
우파정치인들은 시라크와 발라뒤르를 놓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어떤 쪽에 서야 유리할 것인지 눈치를 보고 있다. 여론은 우파의 후보단일화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작년 총선에서 승리한 시라크의 속셈은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발라뒤르를 경제난으로 위험부담이 많은 총리직에 앉히고 자신은 대통령이 되기위한 준비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라뒤르는 정치판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이미지와 성실성, 깨끗한 매너로 국민의 인기를 사로잡았다.
최근 프랑스CSC통신이 시라크의 대선출마선언이후 1천5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발라뒤르는 45%의 지지를 얻어 시라크를 10%포인트 이상 따돌렸다. 대통령출마 3수째인 노련한 정치인 시라크가 스스로의 덫에 걸린 것이다. 알 수 없는게 정치의 세계이고 여론이다.【파리=한기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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