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감옥·13년 지하막장 노역/하루두끼 강냉이 배급… 구걸·산나물 연명 동족상잔의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드라마같은 기막힌 인생유전이었다.
꿈에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긴 조창호씨(64)는 24일 서울중앙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조씨는 북한에서의 오랜 탄광생활로 규폐증뿐아니라 뇌졸중증세로 언어장애와 하반신 신경마비등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목숨을 건 탈출행로에 시달려 탈진한 모습이었으나 혈색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조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15분동안 알아듣기 힘들만큼 기력없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 조씨를 진찰한 의사 김영식씨(가정의학)는『2∼3일뒤에 검사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건강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규폐증을 앓고 있다지만 위중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씨의 발은 심한 무좀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왼쪽종아리부분에 붕대를 감고 보행때는 지팡이에 의존하는등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조씨가 입원해있는 서울중앙병원 특실에는 안기부요원들이 가족과 의료진을 제외한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한편 조씨의 가족들은 당국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신변안전을 전혀 고려치않고 조씨의 탈출사실을 서둘러 공개한데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탈출동기는.
『51년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후 북한에서 13년간 교도소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64년부터 다시 지하 2백 탄광에서 13년간 강제노동을 했다. 그후 내가 살고 묻힐 곳은 북한땅이 아니라 부모 형제가 있는 남한땅이라고 생각, 항상 탈출을 생각해왔다. 더욱이 나는 기독교인으로 가슴에 묻혀 있던 신앙에 불을 지펴 소생시키는 일도 남한에서만 가능하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궁리해왔다.
2년전부터 구체적으로 탈출을 계획해오다 지난 3일 새벽2시께 폭우가 내리는 틈을 이용, 무작정 압록강을 쪽배로 건넜다. 비가 와서 경비가 거의 없었다. 중국으로 건너와 도와줄 사람을 운좋게 만나 배를 타고 어제 한국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중공군에 포로로 잡히게 된 과정은.
『내 군번은 212366번으로 육군본부소속 보병소위였는데 제1포병부대에 속하게됐다. 51년 5월15일 강원 인제에서 미군7사단과 한국군 9사단이 중공군에 완전 포위당했다가 후퇴하게되었다. 그당시 포병부대는 마지막으로 후퇴했는데 나는 연락병과 둘이서 부대를 찾아헤매다 중공군에 붙잡혀 인민군으로 넘겨졌다』
―탈출소감은.
『서울에 도착한뒤 천지개벽같은 변화에 깜짝 놀랐다. 북에서는 남조선은 정치적 혼동을 겪고 있고 학생들이 매일 데모하는바람에 최루탄이 난무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서울은 일본 도쿄나 중국 상해보다 더 발전한 수도라는 사실에 놀랄뿐이었다. 전쟁을 겪고도 우리동포들이 일을 많이 했구나하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죽고난이후 북한의 상황은.
『대를 이어 김정일모시기가 계속되고 있다. 김일성이 죽기전에도 북한에서는 김정일추대작업이 계속 돼 왔다』
―북한의 식량사정은.
『굶어 죽을 지경이다. 중국에서 강냉이를 수입해와 가루와 국수로 만들어 인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그것도 하루 두끼만 배급해줘 인민들은 직접 구걸하거나 산에서 나물들을 뜯어 먹고 있다』【이준희·권혁범기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모범생”/경기상고·연대 동기생들의 회고
연세대 학적과에 보관중인 붉은색 표지의 「륙·이오 학생명부」에는 50년 교육학과에 입학한 30명의 신입생 명단(여학생 1명포함)이 가나다순으로 기록돼있다. 북한에서 탈출한 조창호씨는 이 명부에 1930년 10월2일이라고 적힌 생년월일과 함께 25번째 이름이 올라있다. 연세대 교육학과는 50년 신설돼 조씨등 30명은 첫 입학생이었다.
조씨와 입학동기인 김희곤씨(64·법무사·전북 군산시 문화동893의29)는 『「일주일 대학생」이란 말처럼 당시에는 6월초순이 대학입학기간이기 때문에 전쟁전 보름정도만 학교에 다녀 서로 사귈만한 시간이 없었다』며 『동기생 30명중 3명만이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씨와 경기상고 졸업동기(50년 제23회)인 정연덕씨(63·서울 강서구 내발산동)는 『조씨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고 학업성적은 반에서 중·상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얼굴이 길쭉하고 키가 큰편이었던 조씨는 교회활동을 열심히 했으나 서클활동에는 참여치 않아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동기생들은 회상하고 있다. 당시 6년제로 경기공립상고로 불렸던 경기상고는 6학년이 3개반으로 50년에는 1백50여명이 졸업했다. 정씨는 『조씨가 별다른 특징없이 단정하고 성실해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통했다』고 말했다.【황유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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