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붕괴사고는 21세기를 지향하면서 국제경쟁력 제고와 함께「삶의 질」을 갖춰나가기 위해 근간에 우리가 기울여왔던 숱한 노력과 의지에 또한번 찬물을 끼얹은 원시적 참사다. 국민들은 멀쩡한 다리가 어떻게 저리 허망하게 내려앉을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약간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토목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번 사고는 처음부터 예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토목공학자들 사이에는「우리나라 토목공학은 정치공학」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인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대형 토목공사가 기술이나 이론적 근거에 입각해 설계되고 시공되기보다는 정치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는데서 나온 것이다. 댐이나 다리 도로등 토목공사가 대표적 전시행정 수단으로 이용돼 왔고 선심성 선거공약으로 남발되면서 정치도구화했다는 말이다. 이런 풍토에서 현장여건을 무시한채 무조건적인 공기단축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환경파괴나 인명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묵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수대교는 건설될때부터 대형사고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 다리다. 성수대교가 지어지던 70년대말 우리나라 건설계는 과도기의 상태에 있었다. 당시 이미 한강에 건설돼 있던 10개의 다리는 대부분「슬래브형」또는 「거더형」공법으로 건설됐다. 이들 공법은 비교적 단순해 짧은 시간안에 지을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교각이 너무 많아 수운에 방해가 되고 미관이 안좋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성수대교부터는 새로운 공법을 도입하기로 했던 것이다. 새로운 공법으로 짓게된 성수대교의 교각사이의 간격은 종전 공법으로 지어진 다리의 간격 60m보다 배나 길어진 1백20m로 늘어나게 됐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1백20m로 넓어진 간격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강도가 훨씬 높은 강재를 써야 했고 강판의 두께도 두꺼워져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강재를 자력 생산한지 5∼6년이 안됐으며 두꺼운 강판을 연결해 다리를 만드는 용접교기술이 소개된지도 10년이 안돼 기술력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부실공사의 허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성수대교는 다리 하중이 DB18(총중량 32.4톤을 견딜 수 있는 강도)로 설계된 마지막 다리다. 고도산업사회로 발전해감에 따라 중차량의 통행이 빈번해지고 차량이 대형화함에 따라 이 기준이 DB24(총중량 43.2톤을 견딜 수 있는 강도)로 바뀐 것은 성수대교가 한창 지어지던 78년이었다. 이에 따라 도로교통법도 40톤이상의 중차량의 다리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법 자체가 성수대교가 견딜 수 있는 하중기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법적인 장치도 있으나 마나다. 차량제한을 어기는 과적차량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버젓이 다리를 넘나들고 있는것이다. 과적차량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이 승용차 몇 만대가 지나가는 것보다 다리 수명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데도 아무도 이를 막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설마 저렇게 튼튼한 다리가 무너지기야 하겠느냐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사고는 부실공사도 공사지만 관리소홀에 더 많은 책임이 있음이 분명하다.『이대로 두다가는 다리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녀도 믿어주는 사람은 없고 다들 예산타령만 하는 풍토에서 성수대교는 조금씩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집을 아무리 잘 지어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수년내에 폐가가 되게 마련인데 수많은 인명을 실어 나르는 다리를 지어 놓고도 1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행주대교가 무너져 교량의 유지·보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멀었음이 이번 사고로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왜 다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는 하지만 이 기회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다리의 유지·관리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다른 다리가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한양대토목과교수>한양대토목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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