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미국과 북한간에 핵협상이 타결되자 우리정부를 비롯한 상당수 국민들은 북미합의가 남북관계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해온 북한핵문제를 해결,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개선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평가했다. 단, 이같은 기대는 북한이 합의내용을 성실히 이행할 때만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북한의 신의와 성실을 촉구했다. 그렇다면 지난 18개월간의 「핵공방」에서 주요 당사자임을 자처해온 우리에겐 앞으로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가. 새롭게 전개되는 한반도의 변화및 동북아 질서의 형성을 우리가 주도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 보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그간 핵문제 해결이 답보상태에 이를 때마다 우리사회 일각에서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 북한에 대한 불신은 우리 외교당국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북미회담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서는 곧 「대재앙」이 도래할 듯한 우려가 표출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북한 불신론」은 사태의 신중한 대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북미회담결과를 놓고 마치 한반도에 커다란 축복이 내린 것처럼 환호하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불신이 지나쳐 북미합의가 무의미하고 위험천만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위험스런 사고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올여름 지구 저쪽에서 남의 일같지 않았던 「쿠바난민사태」를 보면서 받은 느낌 때문이다.
미국 플로리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난민행렬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9월초 미국과 쿠바간에 난민문제해결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면서 협상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변수중의 하나는 바로 미국에 거주하는 1백10만 쿠바이주민의 존재였다. 이들은 네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인 플로리다주를 중심으로 쿠바국민재단(CANF)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주요선거때마다 거액의 기부금을 지원하며 주요정책결정과정에 무시할 수 없는 압력단체로 기능해왔다. 그런데 이들 쿠바계 미국인들은 1959년 쿠바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독재자 바티스타의 지지세력으로, 당시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마음은 자신들을 몰아낸 카스트로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피해의식으로 꽉 차있다. 11월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클린턴으로서는 이들 쿠바계 미국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난민사태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쿠바 봉쇄정책을 협상의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대신 쿠바정부가 난민방출을 막는 조건으로 매년 2만명의 쿠바이민보장을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사태를 「미봉적」으로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쿠바의 사례로부터 북미회담타결이후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북한에 대해 신의와 성실을 촉구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자신도 북한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저히 카스트로를 용서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미행정부로 하여금 난민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어렵게 만든 쿠바계 미국인들의 실책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북미합의를 계기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완화의 기회를 우리는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미국의 쿠바 실향민들이 경제봉쇄를 통한 카스트로정권 붕괴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자신의 동포들이 더욱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도록 만든 오류를 피해야 한다. 우리도 북한 지도부를 정책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경제 및 정보통신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북한체제에 대한 「미더운 대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쿠바식 사회주의를 실패로 끝낸 카스트로는 정권유지를 위해 자신의 정권이 붕괴하면 대다수 인민들이 두가지 사항을 감수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바, 하나는 대혼란이요 다른 하나는 미마이애미 거주 쿠바인들의 귀환이다. 대다수 쿠바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감수하기가 너무도 싫기 때문에 쓸쓸한 성당에서 신의 가호만을 기원하면서 대안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보다 피부 색깔이 희고, 거만하며, 편협하고, 부패한 쿠바계 미국인들이 돌아올 경우 자신들의 위치가 더 나아지리라고 기대하는 쿠바인은 거의 없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물질적인 발전에도 힘을 써야 하나 궁극적으로 북한주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통해 성숙한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점이 현실성 없는 가정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고려사항일지 모른다.<외교안보연구원교수>외교안보연구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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