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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적지/해동성국의 위용 찾을길 없고…(두만강: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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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적지/해동성국의 위용 찾을길 없고…(두만강:14)

입력
1994.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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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은 논밭으로… 중선 “지방정권” 폄하/왜곡된 역사… 발끝에 채인 토편엔 왕국의 전설 “아스라이” 698년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세워 2백27년간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왕국. 전성기에 북으로 시베리아, 남으로 함남 용흥강에 닿고 동서로는 요동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찬란한 문화를 일으켜 일찍이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은 나라. 그러나 발해는 우리에게 쉽게 실감되지 않는 역사 저편 전설의 왕국이다.

 두만강이 도문을 지나면서 급하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해에 다다를 즈음에 혼춘시가 있다. 두만강개발계획에 따른 개발붐으로 들뜬 요란한 이 도시에서 서쪽으로 20리 채 못미친 고즈넉한 곳에 발해의 옛 도읍터가 남아 있다.

 두만강지류 훈춘하가 만든 드넓은 퇴적평야 한가운데서 팔련성이라는 화강암 안내석을 발견했을 때 어처구니 없고 허망한 느낌이었다. 팔련성이라면 3대군주인 문왕 대흠무가 천도, 발해의 세번째 도읍이 된 동경 용원부가 있던 곳. 비록 9년만에 다시 지금의 북만주지역인 상경 용천부로 옮겨졌으나 한때 대제국의 수도로서 지녔을 당당한 위용은 주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온통 논으로 변한 너른 들판에 안내석을 중앙에 두고 멀리 사람 키높이 정도의 낮고 좁은 둔덕이 군데군데 돌출해 있고 미루나무가 아득한 거리에 도열해 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옛 성벽의 잔해라는 안내인의 설명이 아니라면 둔덕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허물어진 농로의 모습 그대로였다.

 원래 팔련성은 외성 내성 궁성의 세겹 성벽으로 이루어졌고 성내에는 정자 누각등이 화려했으며 전체 둘레가 3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였다는 설명은 귓가로 흘렀다. 도성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었다는 온특혁부성, 석두하자성 따위의 위성들도 세월의 풍상에 쓸려 사라져버렸다. 씁쓸한 기분으로 논둑길을 따라 나올 때 문득 발끝에 채인 예사롭지 않은 토편이 바로 발해궁의 기왓조각이라는 현지역사연구자의 설명에 다소 위안을 얻었다.

 발해 5경중 두번째 도읍지였던 중경 현덕부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중경 현덕부 자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멀리 용정을 지나 백두산가는 길목인 화룡현 서성향에 있다.

 서고성터로 이름붙여진 이곳도 길 한편의 안내판을 보고서야 간신히 발길을 다잡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흙으로 쌓은 성벽 역시 논두렁길 모습으로 내려앉았고 중앙의 번화했을 도성거리터에는 초라한 중국의 전형적 농촌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내·외성과 궁성 5개로 이루어진 둘레 2.7㎞가량의 웅장한 직사각형 도시는 현실감 먼 기록속에만 있을 뿐이다.

 좀 더 구체적인 발해의 흔적은 이 서고성 근처에 있다. 멀지않은 해란강지류 복동하을 건너면 야트막한 용두산언덕에 대흠무의 넷째딸 정효공주의 묘를 만난다. 일찌감치 도굴돼 내부부장품은 없어도 벽화들을 통해 발해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중국당국의 비공개방침에 부딪쳐 무산됐다. 

 묘를 보호한답시고 묘 위에 역사적 가치의 무게에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붉은 시멘트벽돌에 함석지붕을 이은 20여평짜리 가건물을 흉한 모습으로 얹어 놓았고 거기다 주먹만한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멀리서 보면 그냥 흔한 농가주택으로 보기 십상이었다.

 결국 발해의 실체는 두만강변에서도 그저 희미한 단서로나 잡힐 뿐이다. 오히려 망각의 왕국 발해는 중국인들의 완강한 왜곡과 부정속에서 그 존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안내인은 발해유적지 탐사길 안내를 두만강변에서의 북한땅 근접취재때보다 더 꺼려했다. 한국인들의 발해취재가 혹시 훗날 만주땅에 대한 영유권거론과 연결될지 모른다는 중국당국의 과민반응때문이라고 했다.

 발해는 천년 망각의 세월속에 초라하게 축소되어 있다. 정효공주묘앞 안내판에는 「당조때 속말갈인이 우리나라(중국) 동북과 지금 소련 연해주지방에 세웠던 지방정권」이라고 쓰여 있다.

◎발해에 대한 평가/주변국들,아전인수식 해석… 남·북한서도 소외

 역사의 진실은 하나일 터이지만 현재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의해 재단되게 마련이다. 역사가 현재의 유용성에 종속되는 것이다. 발해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발해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발해의 영토와 역사를 일관되게 계승한 나라가 없고 사료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와 이해가 닿는 주변국들이 나름대로의 유리한 해석으로 대립하고 있다.

 발해영토의 대부분을 점유한 중국에게 발해는 만족에 흡수된 말갈족 중심의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중국역사내의 변방가지쯤 되는 위치이다. 국내학자들은 이같은 견해의 근저에는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분명히 해둠으로써 그들의 분리독립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는 발해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키고 있으나 연해주지방에 연구가 집중돼 있고 중국문화보다는 중앙아시아나 남부시베리아의 영향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넓게 보면 이것 역시 러시아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견해인 것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무관해 연고권을 주장할 처지가 아니지만 발해와의 외교관계를 천황제적 질서의 틀로 보고 있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평가다. 즉 왕이 지배하던 발해에 비해 천황제하 일본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교수는 발해사를 각국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는 남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발해의 성격을 애써 무시한 채 고구려의 계승국으로만 파악하고 있고 정도차는 있으나 우리도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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