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물결속 일성/손기정옹 “고맙다” 눈물 포옹/전국민 환호성 “빛난 한글날” 『히로시마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을 생각하며 악착같이 달렸습다. 지금 이 순간 일본땅에서 질수는 없지 않습니까』
황영조(코오롱·24)가 94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서 하야타 도시유키(조전 준행)를 통쾌하게 제치고 1위로 골인한 뒤 태극기물결에 휩싸인채 외친 첫마디다.
그 옆에서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비극의 영웅 손기정씨가 원자폭탄 투하장소인 히로시마 평화공원 돔을 쳐다보며 눈물을 훔쳤다. 얼마후 일본과 묘한 인연으로 맺어진 한국 마라톤의 두 영웅은 얼싸 안았다.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서 우승할 때의 분함과 부끄러움을 지울 수 없던 손옹이기에 까마득한 후배 황의 쾌거가 벅찬 감동으로 와 닿았다. 노마라토너는 황의 손을 잡고 『고맙다』만 연발했다.
황은 92올림픽서 일본 마라톤의 간판스타 모리시타를 제칠 때는 『더 이상 일본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동료의 부상으로 아시안게임 대표에 추가선발되자 92년8월9일 대선배 손옹이 『일장기를 거느리고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바르셀로나의 감격을 보고 더 이상 소원이 없었다』고 한 말이 떠올랐으며, 일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한번 일본을 제압해야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황은 대선배의 염원과 평화공원 밖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탑의 사연을 듣고나서 『금메달을 따면 죽어도 좋다』고 결심했다. 일제식민지시대 말기 이 곳에 징용당해온 한국인 2만여명이 원폭 투하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 지금도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이곳 교포의 설명이 황의 눈빛을 매섭게 만들었다.
몸살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영혼들이 눈앞에 맴돌아 이를 악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황은 평화공원을 벗어나며 『한국인은 아무리 짓밟혀도 또 일어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고 일본인 안내자에게 말해주었다.【히로시마=박태훈기자】
황영조선수가 일본의 하야타선수를 제치고 넉넉히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골인하는 모습을 TV중계로 지켜본 국민들은 한결같이 『적지에서 일본선수를 물리쳐 한글날의 의미를 더욱 빛내주었다』고 환호했다. 특히 33지점부터 황선수가 하야타를 따돌리고 앞서나가자 『역시 황영조』라고 감격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에 가려고 서울역에서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TV중계를 지켜보던 회사원 최모씨(31)는 『일본이 마라톤에서 한국을 이기려고 코스를 조정하는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데도 황선수가 우승해 통쾌하다』고 말했다.
강원 삼척군 근덕면 황선수의 고향집에서는 마을 주민 1백여명이 모여 열렬히 응원하다 종반에 접어들어 황선수의 우승이 굳어지자 『금메달은 떼논 당상』이라며 징 꽹과리를 치며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황선수의 아버지 황길수씨(52)와 어머니 이만자씨(54)는 인근 절에서 아들의 우승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리다 금메달소식을 듣고 아들의 빛나는 재기를 반겼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상포리 김재룡선수 집에서도 어머니 이부임씨(52)와 마을주민 50여명이 TV를 보다 한국이 금·동메달을 딴 유례 없는 경사를 축하했다.【김진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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