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북한 IAEA 사찰관 추방/김일성,상세보고 못받아”
알림

“북한 IAEA 사찰관 추방/김일성,상세보고 못받아”

입력
1994.10.08 00:00
0 0

◎본보긴급입수 「카터방북기」/배석자들 꼿꼿이 선채로 답변/김,「경수로기술 미서지원」제안 한국일보사는 7일 지미 카터 전미대통령이 지난 6월 북한을 방문, 김일성북한주석과 만나 극적으로 핵문제협상 타결을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기술한 「남북한 방문보고서」(REPORT OF OUR TRIP TO KOREA)를 긴급입수했다. 16절지 6장분량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카터전대통령이 김일성과 나눴던 소상한 대화내용을 비롯, 그가 북한 체류당시 체험한 핵협상과 관련한 평양과 워싱턴간의 긴박했던 분위기등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카터전대통령은 최근 이보고서를 미국의 일부 기관에 자료용으로 배포했다.【편집자주】

 ◇김일성과의 1차회담

 김일성과의 만남은 6월16일 평양의 주석궁에서 이뤄졌다. 김영남외교부장, 송호경부부장, 강석주부부장등이 배석했다. 강부부장은 갈루치차관보의 대화상대자로 미국과의 북핵문제 협상을 전담하고 있다.

 김은 82세였지만 활달하고 명석해 보였으며 핵문제에 대해 매우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북한측 배석자들에게 종종 무엇을 물어보곤 했는데 그들은 바로 일어서서 꼿꼿이 선채 「위대한 지도자」에게 답변하곤 했다. 김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고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초청을 수락해 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면서 내게 첫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나의 방북이 미국정부를 대표하지 않는 비공식 방문이라는 점과 나의  신념, 김영삼대통령과의 회담내용등에 대해 김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미국을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나의 제안을 내놓았다. 또 그가 북한핵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는지 분명히 하기위해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가끔 고개를 끄덕였으며 이따금 내가 얘기를 멈춰 주도록 요청한 뒤 북한측 배석자들에게 무엇을 물어보기도 했다. 나를 수행한 국무부의 통역인 딕 크리스텐슨은 나중에 김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사찰관을 북한이 추방한 중대사안에 대해 자세히 보고 받지 않았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내 나의 모든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는 두가지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는데 하나는 북한이 경수로 기술을 습득할수 있도록 미국이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건설 자금이나 장비를 직접 지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점을 지적했다.(김은 지난 70년대에 브레즈네프전소련공산당서기장으로부터 2천㎿급원자로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체르넨코가 공산당서기장이 된 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제안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다.경수로를 갖게되면 북한은 원전연료인 농축우라늄을 서방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을 수 없으며 북한내에서 생산된 우라늄을 사용하는 흑연감속로의 경우처럼 핵무기급 우라늄의 생산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워싱턴=정진석특파원】

◎본보긴급입수/카터방북기:상/“북,안보리제재 무관심 태도

/“외교압력 굴복보다 전쟁불사” 느낌/김일성,미의 핵불사용 보장등 요구/미 정부브리핑 일부 북의 현장과 상당히 달라/“김약속과 상이”지적에 강석주 자신주장 취소

 김일성의 두번째 제안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않겠다는 점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핵문제해결을 위해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의 개최를 원했다. 그는 회담기간중 핵계획의 동결은 물론 북미회담을 통해 경수로건설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핵개발계획을 영원히 동결하는 문제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김이 이처럼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놀랐다.

 나는 김에게 남한에 핵무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반도 주변해역에도 전략핵무기가 없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또 미국은 북한이 경수로를 갖게 되기를 무척 바라고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김은 한반도가 비핵지대화되어야 한다는 나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느꼈다. 통역인 딕은 판문점에 가있는 비서 매리온 크리크모어에게 전화를 걸어 워싱턴에 어떤 메시지도 보내지말고 평양으로 급히 되돌아오라고 말했다. 비서 매리온은 회담이 결렬될 경우에 대비, 워싱턴에 직접 연락을 취하도록 하기위해 내가 판문점으로 보냈다.

▷방북준비◁

 지난 6월초, 나는 빌 클린턴미대통령이 노르망디상륙작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기 약 1시간전 그와 전화통화를 갖고 점증하는 북한 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때 나는 북한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브리핑을 받기로 수락했으며 실제로 6월 5일(일요일)하오 로버트 갈루치국무부 차관보가 집으로 찾아왔다. 갈루치에게서 브리핑을 받으면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2의 한국전을 피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최고지도자(김일성)와의 대화채널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다음날 북한측은 김일성이 직접 나를 평양으로 초청했으며 초청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재확인해 주었다. 즉시 앨 고어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초청을 수락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다음날 아침 고어부통령이 클린턴대통령과 보좌관들이 나의 평양방문을 승인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애틀랜타의 카터재단에서 예산 심의를 진행하면서 조지아 테크사의 핵엔지니어와 최근 북한을 방문한 CNN방송팀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브리핑을 받았다. 10일 하오 아내 로절린 및 비서인 매리온 크리크모어와 함께 추가 브리핑을 받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우리는 미국의 북한전문가들로부터 받은 브리핑내용중 일부가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추후 북한의 현장을 목격한 후 알게 됐다). 11일 모든 정보를 재검토, 북한방문중 북한측과 나눌 대화의 요점을 정리한뒤 갈루치에게 읽어주었다. 그는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

 12일 우리 일행은 가능한한 많은 브리핑을 받았지만 어떤 분명한 지침이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채 떠났다.

▷김영삼대통령 면담◁

 서울에서는 김영삼대통령과 고위보좌관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우리의 평양방문 계획에 다소 혼란을 느끼는듯 했다. 이홍구부총리는 좀더 적극적이고 협조적이었으며 북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듯 했다.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결과를 몹시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제2 한국전의 피해는 지난 50년대보다 훨씬 심각할 것으로 예측했다.

▷긴장된 방북 첫날◁

 지난 6월15일 나와 아내 로절린, 그리고 수행원을 포함한 우리 일행은 판문점을 넘어 북한땅을 밟았다. 판문점을 넘어가는것은 당혹감을 안겨주는 묘한 경험이었다. 이 당혹감은 남북한 및 북미간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호 이해와 대화가 부족하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다. 지난 40여년동안 한국인이나 미국인들은 깊은 불신, 때로는 중오와 공포심을 안고 비무장지대를 넘었을것이다. 우리 일행은 53년 휴전이후 처음으로 비무장지대를 거쳐 평양을 갔다 되돌아 나올수 있도록 허용된 것이다.

 판문점에서 나를 안내한 칠턴주한미군대령의 설명에 의하면 북미간의 현안은 한국전 당시 죽은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공동조사단 구성에 합의하는 일이었다. 칠턴대령은 한국전 당시 미국이 북한지역을 점령했을 때 전사한 3천명의 미군을 매장해둔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우리일행은 북한의 송호경외교부 부부장측에게 인도됐다. 그의 영접은 북한이 우리의 방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짐작케 해 주었다. 거의 텅빈듯한 4차선 고속도로를 두시간 넘게 달렸다. 그는 북한이 고급 승용차를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버스 열차 지하철과 트럭등은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우리는 평양외곽에서 지하 3백피트(1백)에 있는 멋진 지하철등 대중교통 체제를 목격했다.

 북한측은 방문기간 내내 솔직하고 우호적이었고 한국측에 대한 비난발언에는 아주 신중했다. 북한측은 한반도내에서 양측의 상호 이해부족과 협력에 진전이 없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이러한 결과가 서로간의 실수로 야기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투였다.

 평양에서 처음 만난 인물은 김영남외교부장이었다. 그는 3단계 고위급회담의 재개에 집착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는 나의 제안에 아주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북한에 대한 제재위협은 북한을 탈법국가라든가 최고지도자를 거짓말쟁이·범죄자로 낙인찍는 모욕을 준다는 점외에 어떤 효과도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것이었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에 경제제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과는 거의 교역이 없어 유엔안보리가 추진하는 제재내용은 그들에게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김외교부장의 발언은 정중했지만 그들이 국제사회의 비난과 경제적 압력에 굴복하기 보다는 전쟁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고민에 빠진 나는 다음날 아침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다. 나에게는 어떤 지침이나 권한도 없었다. 절망감에 빠진 나는 매리온 크리크모어를 판문점으로 보내 서울을 통해 워싱턴에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고 위기해소를 위해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 재개제안에 대한 클린턴대통령의 승인을 구하기로 최종 결심했다. 갈루치미국무부차관보의 한국방문 요청도 포함했다.

▷강석주와의 회담◁

 김일성과 첫번째 오찬회담을 가진후 우리는 강석주외교부부부장과 회담하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그는 북미회담의 북한측 수석대표다.

 그는 북한의 관점에서 북핵문제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의 말은 어떤 점에서는 타당해 보였다. 그는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설명했으며 나는 여러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강부부장은 가끔 김일성의 약속과는 달리 자신의 견해를 강변하기도 했는데 내가 그때마다 「위대한 지도자」와 다른 정책을 갖고 있는 것이냐고 묻자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곤 했다.

 강부부장은 북한이 영변원자로의 연료봉 제거를 6개월동안이나 연장시켰다고 전하고 유엔에 제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가 북한이 NPT협정을 위반했으며 사찰관들이 원자로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밝히고 있는데 대해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적절한 제안을 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부부장은 울브라이트 유엔주재미대사와 갈루치차관보의 악의적인 제재발언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평양에 도착하기 전 북한에 체류중인 사찰관을 이미 추방하고 감시장비의 전원을 끊기로 결정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는 북한의 전인민과 군은 그와같은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결집하고 있으며 만약 제재안이 통과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IAEA가 사용후 핵연료봉을 여전히 사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며 이같은 확신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면 융통성을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핵문제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토의를 했다. 그와 이같은 문제를 토의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나와 김일성과의 합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였다.【워싱턴=정진석특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