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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통치능력/최상용(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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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통치능력/최상용(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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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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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성! 60년대 이래 우리가 얼마나 집요하게 요구했던 정치규범인가. 우리가 권위주의체제를 그토록 비판했던 이유도 바로 정통성의 부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장면정권은 우리 현대사에서 최초로 민주적 정통성을 갖추었으나, 통치능력의 결여로 미숙한 「역사의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정권은 정통성의 결여를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무리하게 정당화했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땐 가혹한 억압정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끈질긴 저항을 막으면서 권위주의적 능률을 바탕으로 강권적 통치능력을 발휘했다. 박정권의 근대화정책은 권위주의적 통치전략의 좋은 본보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귀중한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즉 참다운 정치지도력은 권력의 도덕적 기초인 정통성과 함께 효율적인 통치능력의 결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통성이 정치리더십의 필요조건이라면 통치능력은 그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통성이 국민의 민주적 수준을 나타낸다면 통치능력은 정치지도자 능력의 수준을 말해준다. 민주의식이 투철한 국민이 정통성없는 정권을 받아들일 리 없고 탁월한 통치능력으로 위업을 달성한 정치가를 역사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정통성은 집권방법과 관련되는 것으로 권력의 출발점에서 제기되는 문제인데 비해 통치능력은 그 정권의 과정과 결과에서 판가름난다. 이론적으로 최선의 정치는 의도가 선하고 과정과 결과가 다 좋은 경우이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치적 선은 대체로 차선이거나 최악을 피한 차악으로서 과정과 결과를 중시한다.

 김영삼정부는 견고한 정통성을 갖고 출범했기에 한때 90%가 넘는 이례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김대통령의 선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의 통치능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유보하고 있으며, 그의 집권 5년의 결과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추석날 아들의 인사를 받은 대통령아버님의 「우려」도 그런 함의를 가진 것이 아닌가 상상해본다.

 대통령책임제하에서 대통령의 통치능력은 크게 대내통치력과 대외적응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의 존립기반을 흔들어놓은 일련의 사건들을 쉽게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 사건은 설령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범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그 책임소재를 엄밀히 하고 적절한 치유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국민의 절망과 허무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것이다.

 살인강도와 「세도」는 그 간접적인 원인이 사회구조에 내재하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천인공노할 범인들 자신에게 있다. 인간은 약하고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이들의 범죄는 인간의 통념과 관용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수심」이라고들 하지만 짐승은 이렇게 비열하고 잔혹한 행위를 도저히 할 수 없다. 어느 정신과의사는 「지존파」와 「세도」는 형량만 다를 뿐 그 죄질이 같다고 못박았다.

 이들에 대한 법의 엄정한 심판은 우리 사회에 산재하는, 결코 적지 않을 세도와 잠재적인 「지존파」들에게 무서운 경종이 되어야 할 것이며 차제에 정부는 국민이 믿고 세금을 낼 수 있고 안심하고 걸어다닐 수 있도록 제도및 의식 양면에서 발본적 대책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주지 않으면 개인은 정체성을 잃고 사회는 연대성을 잃게 되어 결국 국내통합에 실패하고 만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무정부상태로 이어진다.

 그 다음 우리의 대외적응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서냉전 붕괴에 따른 4각외교의 새로운 조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런데 탈냉전시대에 걸맞게 이들 4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중·장기적인 북한정책을 만들어 그것을 4개국에 인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①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기대하는지 아니면 ②일정기간의 평화공존을 통하여 북한 스스로의 체제변화를 유도할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③「의도적인 애매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책의 부재를 노출할 것인지, 이제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할 때다. 그리하여 북한은 물론 관련 국가에 예측가능한 명백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내심 ①을 바라든가 ③의 즉흥적 대응만으로는 관련 당사국에 불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헷갈리게 하여 부질없는 정쟁을 유발함으로써 국민통합에도 치명상을 주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북한이 무리하게 핵을 고집하고 개혁·개방을 거부할 경우는 체제의 내부붕괴를 재촉할 것이나 그렇지 않고 대화를 통한 핵문제의 타결·점진적 개방을 선택한다면, 더욱이 중국의 북한지지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한국은 이에 중·장기적 전략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북한 핵교섭이 어느 정도의 결실을 거두고 김정일의 공식적 등장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한국은 ②의 선택, 즉 평화공존을 통한 북한 스스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대북정책을 나라 안팎에 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까지는 ①②③의 혼재를 보였으나 ②를 중심축에 둔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대북한관계는 물론 미 일 중 러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대외적응력을 높이게 될 것이다.

 장면정권의 마이너스 교훈과 박정희정권의 플러스 교훈의 바로미터는 바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통치능력이다.<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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