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족기업 창출한다/세계 의류계 “제냐·베네통 돌풍”/유럽회사의 70∼90% 「한집안 소유·경영권」… 이가 으뜸
「아지엔데 파밀리알레(AZIENDE FAMIGLIALE)」 이탈리아의 경제를 떠받치는 주춧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이탈리아사람들은「아지엔데 파밀리알레(가족기업)」라고 말한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몇명의 가족들이 경영하는 유럽의 가족기업들은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기술을 대기업보다 먼저 개발, 업계의 흐름을 주도하는가 하면 수출과 판매에서도 대기업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소비보다는 절약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경제환경에서 가족기업이야말로 이에 필요한 창조력과 유연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가족기업실태를 알아본다.【편집자주】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베로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마을 뒤에는 1천4백80 높이의 트리베로산이 깎아지른듯 서 있다. 한적한 휴양촌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남성패션의 세계 정상급 기업인 「에르메네질도 제냐 그룹」의 아성이다. 제냐그룹이 이탈리아 전역의 우수한 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건설한 이 마을의 3천여 주민 대부분은 제냐의 직원들과 가족이다.
제냐그룹은 4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족기업으로 1910년 창업됐다. 설립 당시엔 가내수공업형태로 원단만을 생산했으나 지금은 한벌에 보통 1백만원대를 호가하는 고급 남성복을 팔아 1년에 2천5백여억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제냐그룹은 경영의 대물림과 때를 맞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창업자인 에르메네질도는 세계 최고수준의 원단을 만드는데 주력하는 한편 1938년 트리베로산 중턱에 현대적인 복지시설을 갖춘 기업촌을 건설해 그룹의 토대를 닦았다. 그의 두 아들인 알도와 안젤로는 양복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60년대초 기성복시장에 진출함으로써 그룹발전의 새전기를 마련했다.
현재 그룹을 이끌고 있는 주축은 창업자의 손자 및 증손자들. 알도의 아들 파올로(원단부문사장), 안젤로의 아들 질도(정장부문사장), 안젤로의 딸 베네데타(국내매장 담당)가 3세 경영인으로, 질도의 딸 안나(해외매장 담당)가 4세 경영인으로 경영에 참가하고 있다.
이들 신세대 경영인들의 주력사업은 직매장의 확대를 통한 제냐브랜드의 국제화. 80년 파리에 최초의 부티크를 개장한 이후 지금까지 전세계에 1백2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산골마을에서 출발한 가족기업이 명실상부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제냐그룹의 성장사는 이탈리아의 무수한 가족기업들이 거두고 있는 성공사례중 하나에 불과하다. 세계의 패션을 리드하는 「베네통」 「막스마라」, 세계 의료기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올사」등이 모두 가족의 끈끈한 우애와 가문의 명예를 최대의 자산으로 삼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가족기업들이다.
이탈리아 만이 아니다. 가족기업은 유럽 각국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에 의하면 이탈리아 기업의 98%, 스위스·스웨덴 기업의 90%, 스페인 기업의 80%, 영국 기업의 75%, 포르투갈 기업의 70%가 소유및 경영권을 1∼2개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가족기업들이다. IMD의 알덴 랑크박사는『정확한 숫자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유럽에서 가족기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클린턴미대통령도 지난해 서방선진 7개국 정상회담에서『유럽의 가족기업들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뭉쳐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며 유럽의 가족기업을 부러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크건 작건간에 유럽의 가족기업들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질에 가문의 명예를 건다. 전통있는 가족기업이 몇 대에 걸쳐 축적한 노하우는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춘 가족 구성원들만이 터득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지역 수공업협동조합의 가브리엘 란프레디니사무총장은 『모방의 천재인 일본의 염색공들이 수차례 이탈리아 염색의 비법을 배우러 왔지만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갔다』며 이탈리아 가족기업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전통과 역사만이 가족기업의 장점은 아니다. 가족기업은 소유나 경영이 안정돼 있어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경영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일단 판단이 서면 신속하게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제냐그룹의 원단부문사장인 파올로 제냐는 『제냐그룹이 남성복 시장에 변화의 기미가 비칠 때마다 기민하게 대처해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빠른 의사결정과정에 힘입은 것이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수공예조합의 자문위원인 니노 돌치니박사는 『대다수 선진국에서 이미 나타났듯 경제가 고품질·고부가가치·고가품 생산체제로 변화할 수록 창조력과 유연성은 21세기를 맞는 기업에 가장 필요한 요소』라며 앞으로도 가족기업은 유럽경제에서 맹위를 떨칠 것으로 전망했다.【트리베로(이탈리아)=김현수기자】
◇유럽 기동취재반
▲유석기(경제부기자)
▲김상우(국제부기자)
▲신효섭(정치부기자)
▲김승일(사회부기자)
▲김현수(여론독자부기자)
▲고재학(전국부기자)
▲송용회(생활과학부기자)
▲황유석(사회부기자)
▲장계문(사진부차장)
▲최종욱(사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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