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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봉오동/함성잠든 청산리엔 산새소리만…(두만강: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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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봉오동/함성잠든 청산리엔 산새소리만…(두만강:12)

입력
1994.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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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격전지는 거대한 댐에 “수몰”/전설적인 양대첩 이젠 조선족 가슴에 남아 용정 3·13만세운동으로 본격화된 간도독립운동은 이듬 해인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신화적인 대첩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홍범도와 김좌진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낳는다. 두 전투의 이야기는 아들 손자에게 전설처럼 전해오면서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두만강변 조선족의 가슴에 엊그제 일같은 생생한 현실감으로 살아 있다.

 전적지는 용정을 중심으로 각각 동서 1백리쯤 거의 대칭되는 곳에 떨어져 있으나 입구의 넓은 평지와 이어지는 수십리 험준한 골짜기의 지형은 많이 닮았다. 병력과 장비가 크게 열세인 독립군이 적의 대병력을 유인, 기습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지형임을 문외한이라도 한 눈에 알아볼 만하다.  

 그해 6월7일에 먼저 전투가 벌어진 봉오동은 용정에서 두만강 하류쪽으로 한참 내려간 도문시 인근이다. 험한 산세를 한동안 헤쳐가다 보면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나면서 토성리라는 30호 남짓한 작은 마을 앞에 「봉오저수지유원지」라고 쓰인 회벽담장이 막아선다. 도문사람들이 자주 들놀이 삼아 오는 곳인데도 놀이시설이나 상점 하나없이 오히려 적막하다. 유원지로 들어가 왼편의 작은 전적비를 뒤로 하고 좁아지는 골 안을 따라오르다 문득 골짜기 양쪽을 막은 높이 20, 길이 1백50여 가량되는 거창한 시멘트 댐을 정면으로 만난다. 항일무장투쟁사의 첫 머리에 오를 봉오동전적지는 안타깝게도 바로 이 댐이 만든 드넓은 인공호 아래 흔적도 없이 수몰돼 있다. 다만 호수 주변을 감싸듯 둘러선 산세의 험준함으로 막연하게 당시의 격전상황을 미루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전투를 이끌어 용명을 얻은 홍범도는 간도국민회산하 대한독립군 7백명을 지휘, 독립군의 근거지인 이곳까지 쫓아 들어온 일본관동군의 정예연대급 병력을 일거에 궤멸시켜버렸다. 홍범도의 첫 공격신호탄으로 시작된 전투는 3일을 이어졌으나 승부는 사실상 첫날 전투로 끝났다. 이 짧은 전투에서 일군은 5백여명이 사상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독립군은 5명의 인명피해를 냈을 뿐이었다.

 신화는 넉달 후 청산리에서 재현됐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등 2천8백명으로 구성된 독립군은 반격을 노리는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을 피해 백두산록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화룡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옮겨 진용을 폈다. 10월20일 골짜기 입구 백운평 너른 평야를 무혈점령한 일본군의 선발부대와 뒤따르던 본대 8천병력이 청산리 협곡에 쳐놓은 김좌진부대의 십자포화망에 걸려들었다. 이후 일군은 홍범도부대가 주력을 이룬 인근 어랑촌전투등을 포함, 6일에 걸친 대회전에서 무려 3천여명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다.

 양편 산줄기가 맞닿아 있는 청산리격전지는 여전히 수목이 하늘을 가린 밀림지대다. 두릅 등속을 캐는 약초꾼이나 벌채꾼들만이 간혹 드나들 뿐 인적조차 끊긴 곳에 산새소리만 무심하다. 백운평에는 너와로 지붕을 얹은 귀틀집 서너채가 무성한 잡초 속에 버려져 있고 여기저기 부서진 담장터 옆에 농기구 따위가 뒹굴고 있다. 원래 20호쯤 됐다는 이곳 마을은 세월의 무게 때문에 허물어져간 것이 아니라 청산리패전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토벌로 영원히 사라졌다. 두만강변 조선인들의 발길이 닿은 어디든 비극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없다.<특별취재반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김좌진·홍범도/항일 무장투쟁사의 두거봉/이념따라 업적 일방적 왜곡

 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은 두 거봉 김좌진과 홍범도의 공적을 섣불리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을 뿐 아니라 쉬운 일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이념의 역사에 의해 어느 한쪽이 부당하게 폄하되는 피해를 당했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며 무장항일투쟁사의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백야 김좌진(1889∼1930년)에 대한 평가는 우리쪽만의 시각이다. 북한이나 또 그쪽 영향이 큰 연변학계에서의 백야에 대한 대접은 아주 인색하며 홍범도(1868∼1943년)에 거의 일방적인 무게를 싣고 있다. 북한역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심지어 청산리대첩을 홍범도의 단독작전에 의한 성과로 기술하고 있다. 또 청산리 입구에 세워진 항일전적비에도 김좌진의 이름은 아예 빠진채 「홍범도의 영도하에」 작전이 이루어졌다고 씌어 있다. 이렇듯 김좌진은 북한과 연변학계에서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가로 그 역사적 위상이 대수롭지 않게 폄하돼 있다.

 이같은 사정은 우리의 경우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김좌진에 대한 평가는 충남 홍성의 명문가 출신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의 신화를 이끌어 낸 그에 대한 마땅한 대접이다. 그러나 그에 상응한 대접을 받을 만한 홍범도는 김좌진의 그늘에 가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홍범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80년대 이후 비로소 우리 학계에서 시도돼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같은 왜곡은 훗날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하는등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고 김좌진이 사상적으로 민족주의노선을 고수하다 조선공산당계열에 의해 암살된 사실이 두 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 때문이다. 분단상황에서 비롯된 이념대립은 해방 후의 역사 뿐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사까지 자의적으로 왜곡, 두 영웅의 업적을 함부로 재단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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