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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채소밭(1000자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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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채소밭(1000자춘추)

입력
1994.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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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마당을 쓸 수 있는 아파트의 일층으로 이사온 일은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추운 겨울에 굳이 일층만을 고집해서 집을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시도 때도 없이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창 뛰어야 할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하는 일은 더 큰 일이었다. 일층으로 이사온 후 아이들도 나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게 되어서 매우 행복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던 기쁨을 하나 더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군데군데 붉은 흙이 보이고 잡초가 무성해 거의 폐허와 같았던 마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궁리하다가 채소를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서툰 솜씨로 땅을 고르고 오이 고추 가지등을 심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친지들이 사다 준 화초도 말려죽이기 일쑤였던 터라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당에 심은 채소에 대한 나의 느낌은 관상용 화초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오이 고추 가지의 꽃은 작고 보잘것 없지만 내게는 어떤 화려한 꽃보다도 더 애틋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더욱이 꽃이 시들어 말라붙으면서 열매를 맺는 모습은 어떤 숙연함마저 느끼게 했다. 유난히 뜨겁고 가물었던 지난 여름, 화초 가꾸는데 무딘 내가 부지런히 물과 거름을 주며 돌보아 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을 통해 경건한 자연의 생명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앞마당의 고추들이 빨갛게 익어가며 가을을 재촉하는 지금, 나는 이 가을에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지,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이 시들어가는 아픔처럼 내게도 어떤 결실을 맺을만큼 치열한 시간들을 보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임지선 작곡가·제1회 안익태작곡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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