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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불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윤지관(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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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불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윤지관(소설평)

입력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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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연대 아픔」이 남긴 좌절된 삶 공선옥의 「불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문예중앙」 가을호)를 읽는 마음은 착잡하다. 서른살의 한 여자와 서른셋의 한 남자가 있다. 이혼 후 혼자 딸아이를 기르고 있는 여자는 작은 양품점을 하면서 백치상태가 돼버린 언니를 먹여살리며 힘겹게 살고 있다. 아직 미혼인 남자는 하는 일 없이 집에 있기 거북하여 친구의 포장마차에 죽치고 있다. 둘은 우연히 그 포장마차에서 만나 가까워진다. 여자는 양품점 전세값을 빼내 방을 마련해서 남자와 동거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에 의존하는 그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고 여자는 혼자 남는다.

 이런 뼈대가 이 작품의 전부는 물론 아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17세된 한 「불량소녀」의 시각으로 전달한다. 실연의 경험이 있는, 그리고 그 때문에 불량소녀가 되고 삶의 슬픔을 모두 겪었다고 생각하는 이 소녀는 이 두 성인남녀의 만남과 이별에 깊은 동감과 아픔을 느낀다. 부모나 선생의 눈으로는 이 소녀가 이해되지 못하듯 이 두 사람의 행동도 일탈적이고 소녀가 삶을 견디고 살아야겠다고 푸념하듯 이들도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되뇐다.  대책없는 좌절된 삶들을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작품에는 그러나, 우리 사회의 최근 역사가 개입해 있다. 여자의 언니는 대학시절 데모중에 그 참변을 당하였고, 남자는 한때 수배까지 당하던 운동권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자가 남자에게 처음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도 남자의 나이가 언니와 같은 서른셋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참담한 지경에 빠진 80년대 운동권 젊은이들의 현재를 그리려 했던 것일까? 남자에게 번데기장수가 마르크스 원전으로 번데기를 싸주고, 「자본론」으로 언니가 딱지치기하는 현실을?

 상처많은 사람이 그렇듯 작가는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음 속의 깊은 반추가 없이 나오는 말은 푸념이 되고 드러내기만 하는 상처는 감상주의를 낳는다. 한탄스런 세월, 떠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로 그려질 때 80년대의 체험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뿌리깊은 좌절감이 시대의 한 현실임을 누가 부정하리요마는 그런 정서에 매몰되지 않는 건강함을 우리의 문학은 요구한다. 젊은 작가 공선옥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경숙을 흉내낸 듯한 문체가 거슬리지만 희망없는 상황을 오히려 희극적으로 꾸며내는 능력도 그에게 기대를 가지게 하는 한 이유이다. 「불탄 자리에 돋는 것」이 절망만은 아닐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문학평론가·덕성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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