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더운 여름이었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그런지는 몰라도 계속되는 무더위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풀뿌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가 하면 외국인은 별로 오지도 않는 「한국방문의 해」도 있었다. 하기는 장마도 왔는지 안 왔는지, 온다던 태풍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디 하나 분명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남북관계도 이해 안되는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핵문제로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더니 카터가 평양을 다녀와서는 모든 문제가 다 풀린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런데 카터가 그 무슨 마술사같은 설득력이라도 있어서 김일성의 마음을 단 한번에 돌려 놓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결의안이 채택될 것 같으니까 김일성이 카터를 불러들여 자기체면을 유지하면서 전술적 후퇴를 한 것인지, 하여튼 전쟁위협이 사라진 것만은 다행한 일이었다.
다만 남북 정상회담만 열리면 금방 통일이라도 될듯이 떠드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소는 반세기 가까이 냉전하면서 정상회담도 여러번 했지만 화해는 커녕 냉전만 계속했고, 동서독도 정상회담을 하고도 긴장과 갈등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는 정상회담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었다. 그리고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북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오열하며 쓰러지기까지 하는 믿기 어려운 장면들이 매일 계속해서 연출되었고, 남쪽에서는 조의를 표하자는 사람들과 북한과는 아예 상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연세대 최정호교수 말대로 북한은 집단 히스테리, 남한은 집단 스키조프레니아(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아 보였다.
우리 언론들도 상식과는 좀 동떨어진 태도를 보인 것 같다. 물론 언론의 성격상 북쪽의 새로운 기대에 대해 뭔가 보도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쪽의 창문마다 캄캄한 커튼이 씌워져 있으니 사정이 어렵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을 거의 매일 커다란 글씨로 뉴스처럼 보도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언론 보도를 보면 김정일이 곧 죽게 된 환자같기도 하고, 밤새도록 술만 퍼마셔도 거뜬한 사나이 같기도 하고, 권력승계에 그 무슨 복잡한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별 문제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위험한 테러리스트 같기도 하고, 실용주의적인 개방주의자 같기도 하고…. 우리 언론들이 보도(?)하는 것을 다 믿으면 김정일보다 우리가 먼저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 같았다. 다행히 풀뿌리들은 언론을 그대로 다 믿지는 않는다.
미·북한 협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보면 「특별사찰」은 중요하지만 북한이 앞으로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더욱이 전쟁을 하지 않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정치외교의 복잡하고 어려운 말들에 관심도 없는 이 나라의 많은 풀뿌리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이 평양과 무슨 관계를 맺건 말건 무엇보다 전쟁을 막고 북한이 그 끔찍한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면서 혹시 어디 숨겨 놓은 것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도 하는 것이다.
그밖에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종류의 문제들은 그런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말인지 몰라도 하루하루 살기가 바쁜 풀뿌리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미·북한간에 어떤 관계가 있게 되리라는 것은 우리가 소위 북방외교를 한다고 떠들고 돌아다닐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인데….
주사파라는 것 때문에도 시끄러웠다.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동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족벌만이 부귀를 누리면서 인민들을 그처럼 혹사시킨, 김일성이 독재수단으로 만들어 놓은 사상도 아닌 「주체사상」을 어떻게 대학까지 다닌다는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사파가 당장 이 나라를 뒤짚어놓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많은 풀뿌리들은 이런 생각을 해봤다. 즉 폭력행동을 하는 사람은 주사파건 아니건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고 생각이 잘못된 사람은 생각을 고쳐주도록 하고….
언젠가부터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위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머리도 가을하늘처럼 맑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마 너무 더워서 판단의 균형을 잃었던 것 같다. 상식의 계절을 기다린다.<사회과학원장>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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